소비로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소비로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또 바꿨어? 저번 아이폰 아직 괜찮더니”
“신상이 나왔으면 바꿔주는 게 잡스형님에 대한 예의지”
“야, 넌 아이폰 기능도 다 모르면서 왜 굳이 꼭 애플 거만 사냐?”
“뽀대나잖냐!”
친구 중에 소위 말하는 ‘애플빠’가 있다. 그는 MP3는 물론이고, 스마트폰, 컴퓨터까지 전부다 애플 제품을 사용한다. 그리고 새로운 모델이 나올 때마다 제일 먼저 구매한다. 애플 제품이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친구는 애플이 가지는 기술적 섬세함이나 사용 편의성 같은 장점들 때문에 애플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애플을 구매하는 이유는 그의 말마따나 ‘뽀대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앞서 소비를 하는 이유가 기호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 소비하는 이유는 대개 자신의 어떤 특정한 신분이나 계급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그렇다. 내 친구가 말하는 ‘뽀대’는 사실 ‘스마트한 사람’, ‘얼리어덥터’, ‘기술의 최첨단에 있는 사람’이라는 특정한 계급·신분이었을 게다. 실제로 그는 아이폰이나 맥북의 다양하고 유용한 최신 기술을 잘 사용하지 못한다. 그는 애플의 제품을 소비하면서 그런 특정한 계급이나 신분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신분, 계급을 표현하려고 소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정말 소비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라고 답할 게다. 스포츠 브랜드 옷을 소비하는 사람은 자신이 운동을 좋아하는 역동적인 사람임을 표현할 수 있다. 또 깔끔한 니트에 면바지 그리고 뿔테 안경을 소비하는 사람은 지적이고 자상한 사람임을 표현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의 첫인상은 대부분 옷차림이나 그가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판가름 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표현하기 위해 소비한다. 그리고 일정 정도 그 소비로 자기표현이 가능하다. 귀여운 옷, 장신구를 많이 소비한 여자는 사람들에게 그런 이미지의 여성으로 비칠 확률이 높다. 지적이고 도시적인 느낌을 주는 옷, 구두를 많이 소비한 여자는 사람들에게 그런 이미지의 여성으로 비칠 확률이 높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는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소비를 하는 셈이다. 귀여운 모습으로 비춰지고 싶은 여성이 검은색 정장에 빨간색 하이힐을 소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두 가지 ‘나’의 괴리만큼 더 소비한다.
여기서 잠시 ‘나’에 대해서 말해보자. 우리에게는 두 가지 ‘나’가 있다. 그런데 ‘진짜 나’와 ‘나였으면 하는 나’, 이 두 가지 ‘나’가 일치하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였으면 하는 나’를 ‘진짜 나’라고 억지스럽게 믿으면서 살아가기 바쁘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문득 ‘진짜 나’를 대면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 모습을 덮어두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다.
자신은 항상 결단력 있고, 도전적인 삶을 살아가는 부류라고 믿고 있는 직장인이 있다고 해보자. 그에게 퇴사의 순간이 다가왔고, 바로 그때 그는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우유부단하며 전혀 도전적이지 않은 ‘진짜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아주 드물다. 대개는 “꼭 직장을 그만두어야 결단력 있고, 도전적인 것은 아니잖아!”라며 ‘진짜 나’를 덮어두고 합리화하기에 바쁘다.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만이 ‘진짜 나’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비는 아주 유용하다. 소비를 통해 ‘진짜 나’를 은폐하고 ‘나였으면 하는 나’를 더욱 자극적이고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를 통해 표현하려는 ‘나’는 분명 ‘진짜 나’가 아니라 ‘나였으면 하는 나’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있는 그대로의 ‘진짜 나’를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였으면 하는 나’를 더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하려고 애를 쓴다. 바로 소비를 통해서 말이다.
날씬해 보이는 옷을 사려는 이유
일상의 사례로 말해보자. 백화점에서 날씬해 보이는 옷을 누가 더 많이 살까? 실제로 날씬한 사람은 날씬해 보이는 옷을 결코 사지 않는다. 뭣 하러 날씬한 옷을 사겠는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이 이미 날씬한데. 오직 뚱뚱한 사람들만이 날씬해 보이는 옷을 사려고 애를 쓰게 마련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나는 한 때 100kg 가까이 나간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옷을 사는 기준은 딱 하나였다. 색상, 아무 색이면 어떤가? 디자인, 상관없다. 오직 날씬해 보이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내가 73kg이 되었을 때, 단 한 번도 날씬해 보인다고 광고하는 옷을 산 적이 없다. 아니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뚱뚱한 사람에게 ‘진짜 나’는 잔인한 거울에 비친 모습 그대로다. 접히는 뱃살에 지방이 덕지덕지 붙은 허벅지까지. 바로 그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다. 하지만 뚱뚱한 사람의 ‘나였으면 하는 나’는 어떨까? 아무 옷이나 입어도 잘 어울리는 그런 날씬한 모습일 게다. 뚱뚱한 사람이 날씬해 보이는 옷에 집착하고 또 그런 옷을 그리도 많이 사다 모으는 이유는 ‘나였으면 하는 나’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돈을 써서라도 ‘진짜 나’를 은폐하고 ‘나였으면 하는 나’를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나였으면 하는 나’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소비를 하는 셈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진짜 나’와 ‘나였으면 하는 나’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이 소비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뚱뚱한 정도가 심한 사람이 날씬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를 바라는 욕망 역시 클 수밖에 없다. 그러니 뚱뚱한 사람이 날씬해 보이는 옷을 소비할 가능성 역시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그 욕망의 괴리는 결국 소비로 채워진다. 그것이 옷이든, 다이어트 식품이든 말이다. 두 욕망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소비도 커질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도 여기서 우리는 소비로부터 자유로워질 하나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 ‘나였으면 하는 나’ 대신 ‘진짜 나’의 모습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럴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소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뚱뚱하다면 그 뚱뚱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의 긍정하게 되면 억지스럽게 날씬해 보이는 옷을 사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김지양’이라는 모델이 있다. 그녀는 말라깽이 같은 모델의 관점에서 보면 통통 아니 뚱뚱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며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게 '진짜 나'를 긍정하는 사람이 날씬해 보이는 옷을 사다 모을 일은 없을 게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일정 정도 소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