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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진짜 나'는 ‘소비’가 아니라 ‘생산’에 있다.

소비로는 우리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없다.

소비로는 우리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없다.

소비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려는 행동 양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소비로 표현할 수 있는 정체성은 ‘나였으면 하는 나’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진짜 나’는 결코 소비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깔끔해 보이는 면바지에 니트를 입고, 한 눈에 보기에도 모범생처럼 보이는 뿔테 안경을 쓴 남자를 상상해보자. 그는 분명 지적으로 보인다. 니트, 면바지, 뿔테 안경을 소비해서 지적인 이미지로 보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정말 지적인지 아닌지는 그 모습으로는 결코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스마트 폰, 노트북, 태블릿PC 등 최신 IT기기로 무장을 한 사람을 보면 ‘스마트한 얼리어덥터’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스마트한 얼리어덥터’인지는 그가 소비한 상품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소비로 우리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였으면 하는 나’의 영역 안에서만 가능하다. 실제로는 면바지에 니트를 입고, 뿔테 안경을 썼지만 조금만 이야기해보면 지적이기는커녕 무식이 철철 흘러넘치는 사람도 많다. 또 갖가지 IT기기를 갖고 있지만 스마트한 얼리어덥터는 고사하고 그가 그것으로 하는 것이라곤 통화, 문자, 오락뿐인 경우도 흔하다.


 소비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은 허영이다. 돈을 주고 산 물건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라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의 정체성은 상품과 함께 낡아진다는 의미고, 상품이 수명이 다하면 정체성의 수명도 다한다는 의미 아닌가? ‘나였으면 하는 나’로 타인에게 비춰지기 위해 소비를 하는 것일 뿐이다. 소비로서 표현되는 정체성이 정말 자신의 정체성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 남루하고 초라한 것인가? 비싼 차, 비싼 아파트, 좋은 옷, 최신 노트북이 한 사람의 정체성이라면 그 정체성은 그 차, 아파트, 옷, 노트북이 사라짐과 동시에 함께 휘발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소비로서 진정한 정체성은 표현할 수 없다. ‘진짜 나’의 모습은 소비된 상품 따위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비는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 갇혀 ‘나였으면 하는 나’를 표현하기에 급급한 사람들의 미봉책일 뿐이다.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며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소비 혹은 소비된 상품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아무리 많이 소비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나타낼 수는 없다.

     

우리의 정체성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에 있다.


이제 하나의 질문만 남는다. 소비 혹은 그 소비로 인해 소유하게 된 상품들로 자신을 나타낼 수 없다면, 도대체 우리의 정체성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답을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얻었다. 그는 ‘골목사장 분투기’, ‘착해도 망하지 않아’라는 책의 저자, ‘강도현’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소비가 아니라 생산에 의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탁견이다. 무릎을 쳤다. 자신의 정체성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에 달려 있다. 쉽게 말해 ‘내가 무엇을 소비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생산하느냐?’가 바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정직한 자신의 정체성이란 이야기다.


 삶을 돌아보자. 니트, 면바지, 뿔테 안경을 구매하는 사람이 지적인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담은 짧은 글을 조리 있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지적인 사람이다. 즉 니트, 면바지, 뿔테 안경을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담긴 글을 ‘생산’해낼 수 있는 사람이 지적인 사람인 것이다. 지적인 사람은 어려운 철학 책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이 담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최신 스마트 폰, 노트북을 ‘소비’하는 사람이 스마트한 얼리어덥터가 아니라 그 스마트 폰과 노트북으로 편리하고 유의미한 컨텐츠를 ‘생산’해내는 사람이 스마트한 얼리어덥터다.


 ‘진짜 나’의 모습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에 있다. 소비를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것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였으면 하는 나’일 뿐이다. ‘진짜 나’의 모습은 생산에 달려 있다. ‘진짜 나’를 알고 싶은가? 어려울 것 없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지금 자신이 무엇을 생산하고 있는지만 유심히 살피면 된다. 자신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생산해내는 것이 겨우 직장 상사나 사장이 시킨 보고서뿐이라면, 그는 독립적인 사람도 자유로운 사람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독립성, 자유로움의 이미지를 내건 패키지 배낭여행상품을 소비하는 것뿐일 테다. 그래야 불편한 ‘진짜 나’를 은폐할 수 있을 테니까.


잔인한 겨울, 생산


어쩌면 이것은 조금 엄격하고 그래서 잔인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소비로 자신의 모습을 포장할 수 있지만, 생산은 전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산에는 에누리가 없다. 생산은 잔인하리만치 정직한 거울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비추는 거울. 한 사람의 직업이나 일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이 생산하는 것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업무일 뿐일 때, 그는 아무리 좋은 상품을 소비하더라도 그의 정체성은 지겹게 반복되는 존재일 뿐인 것이다. 자신이 매일 생산해내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장이 시키는 것뿐일 때 ‘나’의 정체성은 노예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없게 된다.


 ‘나의 정체성은 생산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는 잔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당당하고 근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는 비밀 또한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당당하고 근사한 사람이 되려면 그런 이미지를 주는 얄팍하고 기만적인 상품을 소비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고 근사한 어떤 것을 생산해내면 된다. 그런 소망스러운 것들 생산할 수 있다면, 우리 역시 당당하고 근사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에 달려 있는 것이니까.


 삶에서 오직 자신이니까 생산해낼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이라고 더 생산해내려고 노력하자. 음악을 좋아한다면 가끔 기타를 좋은 음악을 ‘생산’하자! 조각하는 것이 좋다면 가끔 자신의 영감에 따른 조각품을 ‘생산’하자! 글을 쓰는 것이 좋다면 자신의 생각을 닮은 짧은 글 하나를 ‘생산’하자! 그렇게 오직 나니까 생산해낼 수 있는 것들을 생산할 수 있을 때, 누구도 흉내 내지 않는 오직 나다운 정체성을 가진 근사하고 멋있는 사람이 되어 갈게다. 행복, 그것이 뭐 별건가? 자신다운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 정체성을 따라 자기답게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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