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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강북사람의 꿈은 강남에 사는 것이다.

우리가 돈에 쪼들리며 살 수밖에 없는 불편한 이유

강북 사람의 꿈은 함께 잘사는 것이 아니라 강남에 사는 것이다.


“요즘 사회가 너무 각박한 것 같아. 예전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러게 말이야. 이게 다 신자유주의 때문이야”
“그렇지, 이렇게 돈이면 무엇이든 다 된다고 생각하는 지금 사회 때문에 더 각박해진 거지”
“우리나라도 빨리 유럽처럼 복지국가로 가야 돼!”
“맞아, 맞아, 정말 그렇게 돼야 해”

 

 약속 때문에 목동에 갈 일이 있었다. 글도 쓰고 책도 조금 읽을 요량으로 약속 시간보다 두어 시간 먼저 약속 장소인 한 카페에 도착했다. 내 옆에 앉아 있었던 아줌마들 서너 명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 한 편이 흐뭇해지고 또 작은 희망도 보았다. 지금처럼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구조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또 나름의 대안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하지만 그런 흐뭇함과 희망은 얼마 가지 않았다.


 약속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금 전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해 목청을 높이던 사람들이 ‘목동 행복주택 철수하라!’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행복 주택이란 소득 수준이 충분히 않은 사람들을 위한 저렴한 도심형 아파트다. 쉽게 말해 정부 차원에서 돈 없는 사람들도 도심의 아파트에 살 수 있도록 만든 아파트다. 목동의 사람들이 행복주택을 반대하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인구밀집, 교통난을 꼽고 있지만 이는 사실 본질이 아니다.


 목동의 아줌마들이 행복주택 건설을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명문 학군으로 쌓아 왔던 부유한 동네라는 이미지 손실과 그로 인한 집값 하락 우려 때문이다. ‘님비’현상 같은 어려운 사회학적 용어 대신 이 현상의 본질을 일상의 언어로 말해보자. ‘돈 없는 인간들이 우리 동네 들어와서 집값 떨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방금 전 까지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해서 목청을 높여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자기 집값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고 심지어 시위까지 하는 그 이중성에 정말이지 당혹스러웠다.


 그래,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자기 집값 떨어지는 것이 달가울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다들 힘들게 번 돈으로 장만한 집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자본주의에 대해 진지한 의구심을 갖고 사람조차 약자에 대한 배려보다 내 집값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이건 조금 다른 문제다. ‘강북 사람의 꿈은 함께 잘사는 사회가 아니라 강남에 사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서글프게도 이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항상 ‘누구보다’라는 수식어 붙는 것이 현실이다.


돈에 쪼들리며 살수밖에 없는, 불편한 이유


목동 아줌마들을 욕할 것도 없다. 똑같은 상황이 펼쳐진다면, 우리도 어찌할지 장담할 수 없다. 목동에 집이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진지하게 돌아보자. 우리가 매번 돈에 매여 힘든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인가? 주위를 둘러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요즘 같은 빡센 세상에 어디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


 직장인은 매일 아침 지하철에 고된 몸을 싣고 야근까지 한다. 겨우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장사를 하는 사람은 또 어떤가? 새벽부터 일어나 장사를 준비하고 밤늦게 까지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들 이렇게 ‘열심히’란 단어 보다 ‘가혹’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릴 만한 그런 삶을 살아 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경제적 쪼들림을 겪으며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일정 정도 우리의 기만성 때문이다. 최소한의 사람다움도 보장하지 않는 승자독식의 자본주의는 나쁘다고 하나 같이 입을 모은다. 하지만 그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인 돈은 아주 좋아한다. 바로 그 기만성 때문에 우리가 늘 돈에 쪼들리며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그 기만성을 확대재생산해 자신의 몸집을 키우고 생명을 유지한다. 직장을 다닐 때 이런 기만성을 직접 본적이 있다.


 예전에 다녔던 직장은 연말은 정리해고 시즌이었다. 연말이면 함께 울고 웃으며 일했던 동료의 빈자리를 허탈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서글픈 연말 어느 날이었다. 해고자 명단이 발표되자 어떤 동료가 ‘그 사람을 해고하지 말고 급여를 줄이자!’고 말한 적이 있었다. 분위기가 어땠을까? 다들 뒤에서 ‘그냥 그 사람 내보내면 되지, 왜 내 월급을 줄여’라고 수군거렸다. 이것이 지금 사회의 적나라한 민낯이다.


 지금이야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해고되지만, 그 대상은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된다. 지금 우리가 급여를 조금 줄여 해고당할 사람을 지켜준다면, 우리 역시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해 당장 생계가 위협받는 막막한 삶을 살을 살지 않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월급쟁이가 직장에서 늘 해고의 불안에 떨고 그곳에서 모든 것을 걸고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자신이 부당하게 해고당하는 사람 앞에서 침묵했기 때문이다. 그 침묵은 바로 우리가 당할 해고의 침묵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직장에서 더 불안하고 그곳에 더 매달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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