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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우리의 기만성부터 극복하자!

99%는 1%가 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에 세뇌 당한 대가, 불안

자본은 ‘함께 잘사는 사회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우리를 세뇌시킨다. 사장은 직원에게 ‘함께 잘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서로 경쟁해서 더 나은 상품이 되라!’고 말한다. 매일 업무도 경쟁이고, 승진도 경쟁이다. 거기에서 함께 잘살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세뇌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면, 더 이상 자본주의를 싫어하지도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자본주의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믿게 되고, 나중에는 급기야 자본주의를 긍정하기에 이른다.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경쟁은 당연한 것이고, 다른 사람은 어찌 살든 말든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식의 자본주의를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병적인 자본주의를 완전히 내면화한 대가는 필연적으로 불안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완전히 내면화하게 되면 경쟁에서 낙오한 책임은 모조리 무능한 자신에게 있다고 믿게 될 수밖에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무한경쟁을 긍정하는 자본주의는 만고불변의 진리인데, 그 진리에서 낙오했으니 모든 책임은 오롯이 자신에게 있는 것 아닌가? 이제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목동 아줌마들이 사활을 걸고 행복주택에 반대하는 이유도, 내 월급을 깎아 누군가의 해고를 막느니 그냥 그 사람을 해고하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목동 아줌마들이 행복 주택 반대 시위를 하는 것은 사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집값이 떨어져 돈이 없어지면 바로 자신이 그 행복주택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시위를 하는 게다. 직장인들이 월급을 깎느니 다른 사람을 내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언제 잘릴지 모르니 직장에 있는 동안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비정상적인 자본주의의 악순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왜 뉴타운 공약에 열광했던 걸까?


한때 국회의원 출마자가 너도 나도 내걸었던 슬로건이 바로 ‘뉴타운’ 공약이었다. 그들이 뉴타운 공약을 전면에 내 걸었던 이유는 ‘다른 데는 모르겠고, 일단 우리 동네 집값만은 확실히 올려 주겠다!’는 논리였다. 우리 속에 있는 자본주의적 탐욕을 노골적으로 자극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결국 그 탐욕에 손을 들어주었다. 멀쩡한 강을 뒤집어 파는데 천문학적인 돈을 퍼부은 가짜 경제 대통령을 불러 낸 것도 결국은 우리의 탐욕 아니었던가? 그러면서도 돌아서면 다들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문제가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돈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남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방법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더 현명하고 지혜롭다. 극단의 자본주의를 긍정하든 혹은 부정하든 관계없이 돈을 더 벌려고 하면 결국에는 1%만이 그 돈을 다가지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비정상적인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지 않고 모두가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없다. 남들 보다 많이 벌어 돈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는 방법은 잠시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결국 그 끝은 더욱 돈에 매이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직장인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보자. 월급쟁이는 직장의 1%인 임원이 되면 돈 걱정은 하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평범한 직장인은 그 1%의 삶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린다. 그 과정에서 잠시 대리, 과장, 차장이 되는 희망을 만끽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끝은 어떤가? 대부분 직장인들은 임원이라는 1%의 삶을 동경하고 그곳으로 달려가지만 종국에는 정리해고를 당하게 된다. 그 적나라한 삶의 민낯을 우리는 이미 각자의 일터에서 목격하고 있다.


 대부분의 월급쟁이들은 돈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1%를 꿈꾸며 직장에 모든 것을 건다. 하지만 결국 99%는 중간에 낙오할 수밖에 없다. 더 서글픈 것은 바로 그 선택 때문에 그 99% 중 대부분의 월급쟁이들은 직장을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그 대부분의 월급쟁이는 필연적으로 더욱 심각하게 돈에 매인 삶을 살게 될 수밖에 없다. 안타깝고 서글프지만, 평범한 우리는 언제나 99% 중 한명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기만성부터 극복하자!    


앞서 말한 직장의 1%와 99%의 논리는 우리 사회로 확장할 수 있다. 1%의 삶을 살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현실은 여전히 99%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청년들이 일자리를 갖지 못하고 취업난에 시달리는 일은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또 한국 경제의 기형적으로 대기업에 의존하고 있는 문제는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남보다 잘살고 싶다! 나만 잘살고 싶다!’는 탐욕적 야만성을 통제하지 못할 때, 자본은 우리의 그 야만성을 집요하게 이용해서 언제나 자신의 몸집을 키울 것이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리고 자본이 몸집을 키우면 키울수록 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궁핍해질 것이고, 소수의 사람만이 더 부유해질 것이다. 직원들이 서로 경쟁하면 할수록 직원들은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더 직장에서 충성하느라 피폐해지겠지만 그로 인해서 사장은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것처럼.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싶다면, 우리의 기만성을 극복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경기가 안 좋다는 명목으로 동료를 해고 하려고 할 때, 당당하게 사장에게 말하자. "월급을 낮춰 함께 계속 일을 하는 게 좋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자본주의는 극복 가능할 게다. 내 집 옆에 돈 없는 사람들이 사는 행복주택을 지으려고 할 때, 아내와 남편에게 말하자. "그래, 우리도 한 때 집이 없어서 고생했잖아" 그럴 수 있다면, 자본주의는 극복 가능하다.

   

 강북에 사는 사람의 꿈이 강남으로 이사 가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강북사람, 강남사람이란 구별 없는, 우리의 꿈이 다 함께 잘사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 소망스러운 꿈을 함께 꿀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지금의 병적이고 천박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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