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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소비자=노동자'라는 불편한 진실

파비앙이 자랑하고픈 한국의 배달 문화

‘파비앙’이 자랑하고픈 한국의 배달문화

외국인 남녀 일곱 명이 한강 고수부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중 능숙하게 한국말을 하는 파란 눈의 청년이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배달을 시킨다. ‘나 혼자 산다’라는 TV프로그램에 나왔던 장면이다. 배달을 시켰던,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던 사람은 ‘파비앙’이라는 프랑스 청년이다. 그날은 프랑스에서 친구들이 한국으로 놀러와 친구들에게 서울 투어를 시켜주는 날이었다. 얼마나 기특한가? 파란 눈의 외국인이 한국이 좋다고 자청해서 외교사절단 역할까지 기꺼이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의 매력에 대해서 친구들에게 열정적으로 설명할 때는 고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좋은 감정은 딱 거기까지였다.


 “한국 정말 좋아, 프랑스에서 피자 시켜 먹으려면 일요일은 안 되고, 오후 3시~6시 사이도 안 되고, 밤 11시 이후에는 안 되고, 배달 시간도 오래 걸리잖아. 여긴 뭐든 다 배달 돼. 한국 배달 문화는 끝내 줘”

 

 배달음식이 도착하자 파비앙이 프랑스 친구들에게 한국에 대해서 자랑하기 위해 꺼낸 말이다. 파비앙의 이 말이 진짜 그의 생각이든 아니면 제작진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든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주말이든 새벽이든 낮이든 상관없이 음식이 배달되고, 배달을 시키면 언제나 총알같이 음식을 대령하는 것이 정말 좋은 걸가? 이게 정말 한국의 자랑할 만한 문화인걸까? 씁쓸했다. ‘한국에 자랑할 만한 문화가 이다지도 없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업무 차 미국 시애틀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황당한 일이 있었다. 업무가 늦게 끝나 지인들과 늦은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술을 한 잔 마시러 가려했는데, 근처 술집이 거의 문을 닫은 것이 아닌가! 그때 시간이 10시가 채 안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자본주의의 심장이라는 미국에서 초저녁(한국기준으로)부터 술을 팔지 않는 것이었다. 기본 2~3시까지 이어지는 한국 유흥 문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당황할 법도 했다. 돈 버는 것을 한국보다 더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결코 덜 좋아하지는 않을 미국에서 그리도 일찍 술집이 문을 닫았으니.


 왜 그런 걸까? 프랑스에서는 왜 피자배달 하나 시키는 것도 그처럼 불편하게 짝이 없는 걸까? 몇 번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도 알아듣지 못할 ‘미셸 푸코’라는 철학자의 책이 바캉스 철 베스트셀러가 되는 그 선진국에서 말이다. 미국에서는 왜 10시 넘어서 운영하는 술집이 거의 없는 것일까?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 자본주의 심장, 미국이라는 그 선진국에서 말이다. 한국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아주 편하게 시키는 배달 문화는 너무 당연한 것이고, 새벽 2시가 넘어도 네온사인이 번쩍 거리는 술집이 곳곳에 즐비한데 말이다.

소비자로서의 권능은 노동자로서의 억압으로 고스란히 되돌아 온다.


한 때 자신의 일을 프로페셔널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냉장고 A/S기사 약속 시간에 늦거나 냉장고 잘 고치지 못할 때 잘 참지 못했다. 음식점에서 덜 익히거나 탄 음식이 나올 때 종종 화를 내곤 했다. 창피하게도 ‘이런 식으로 하면서 밥 벌어 먹고 살겠어!’라며 그들을 타박했고, 또 다그쳤다. 소비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앞세워 그들을 타박하고 다그쳤던 게다. 하지만 그 타박과 다그침은 고스란히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업무의 작은 실수나 과도한 업무에 절절매고 있을 때 상사의 ‘이런 식으로 하면서 밥 벌어 먹고 살겠어!’라는 말에 한 없이 위축되었으니까.


 소비자로서 군림하고 더 권한을 행사하려고 할 때, 그만큼 노동자로서 더 많은 모욕을 견뎌야 하고 더 많은 업무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독일을 갔을 때였다. 점심을 먹으러 현지의 어느 음식점을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처럼 반갑게 미소로 맞아주는 것은 고사하고 컵을 내주는 것도 성의 없이 툭 놓아주는 것 아닌가? 처음에는 ‘동양인이라 무시를 하는 건가?’라는 괜한 자격지심에 다른 손님들을 대하는 것을 살폈지만 그 종업원의 태도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유럽의 종업원들은 원래 한국의 종업원들처럼 친절하지 않다. (한국 종업원의 친절이 사실 꾸며진 친절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이 정말 친절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소비자들 역시 종업원의 불친절해 보이는 태도를 전혀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소비자라고해서 종업원에게 군림하려거나 억지스러운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알 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식당에서 돈을 쓰는 소비자이지만 식사를 끝낸 후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면 나 역시 노동자라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말이다. 


'소비자= 노동자'라는 불편한 진실


자본주의라는 미친 열차를 멈추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이제 프랑스의 배달문화가 불편한 이유, 시애틀의 술집이 일찍 문을 닫는 이유를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 두가지 이유는 같다. 그들은 알고 있는 게다. 우리는 모두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라는 자본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말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피자를 시켜 먹는 자신이 바로 직장에서는 고되게 일해야하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국 사람들은 자신이 때로는 늦은 시간까지 술을 먹고 싶은 소비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찍 퇴근해서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싶은 노동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피자 배달을 빨리 하기 위해 오토바이 과속을 하다 죽은 젊은 피자 배달원이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고백하자. 나는 사고로 죽은 어린 배달원을 보고 한편으로는 마음 아파했지만, 돌아서서 내 짜장면이 불어서 오는 것은 결코 참지 못했다. 바로 내가 그 짜장면 배달을 하는 노동자일 수 있고, 또 우리의 아이들이 그 짜장면 배달을 하는 노동자가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돈을 쓸 때는 자신이 모든 권능을 가진 소비자이지만 동시에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닥치고 시키는 일을 해야만 하는 노동자다.


 맞다. 지금 우리는 짜장면과 피자 배달원이 아닐 수도 있다. 또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다. 짜장면과 피자를 시켜 먹는 소비자가 되기 위해서 고되고 치사스러운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여야 한다는 사실은 결코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야근, 주말특근을 하기 때문에 편리하기 짝이 없는 배달문화가 생길 걸까? 아니면 그 편리한 배달 문화 때문에 우리가 야근과 주말 특근을 더 자주하게 된 걸까? 선후관계는 중요치 않다. 문제는 우리가 소비자로서 점점 더 편리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노동자로서 더 빡세게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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