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편리함 VS 자발적 불편함
강요된 편리함 VS 자발적 불편함
우리는 편리함을 선호하고 추구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오해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편리함을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편리함을 선택하고 있지 않다. 자본에 의해 ‘강요된 편리함’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편리를 위해서 등장했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다. 자본이 더욱 커지기 위해서 등장한 ‘강요된 편리함’일 뿐이다. 그것은 전혀 자발적이지 못하다. 강요당한 편리함을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일상과 가장 가까운 핸드폰으로 이야기해보자. 핸드폰의 등장으로 삶이 더 편리해졌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 편리함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정말 그럴까? 핸드폰의 등장으로 그것의 편리함을 강제적으로 알게 된 건 아닐까? 그래서 그것을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돌아보면 사실이다. 한 때 삐삐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집 전화와 편지만으로도 충분했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스마트폰이 없어서 ‘카카오 톡’ 어플을 깔지 못하면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조차 제외될 판 아닌가? 이것이 정말 자발적인 걸까?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블루투스 기능이니 크루저 기능(고속 주행에서 가속페달을 안 밟아도 속도를 유지하는 기능)이니 하는 수많은 편리 기능이 자동차에 생겼다. 하지만 그런 기능은 사실 우리가 원했기 때문에 생긴 게 아니다. 그것에 익숙해져서 그것이 없으면 상대적으로 불편하게 느끼게 된 것일 뿐이다. 아니 승용차 자체가 그렇다. 승용차가 드물던 시절 기차와 버스를 타고 얼마든지 우리가 가고 싶은 갈 수 있지 않았던가. 더 편리해진 것 같지만 사실 그 편리는 우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을 위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건, ‘자발적 불편함’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발적 불편함’이다. 물론 모두 원시 시대로 복귀하자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스마트 폰을 쓰고, 승용차를 탈때도 있다. 그 편리함이 좋다. 자본주의에 적응한 사람으로서 그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을 게다. 하지만 나는 분명 ‘강요된 편리함’ 보다는 ‘자발적 불편함’을 지향한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자본주의를 혁명할 수 있는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웬만하면 음식점에서 음식을 빨리 달라고 독촉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또 외식을 하는 것도 보다 가급적 집에서 직접 음식을 해먹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승용차 보다는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짧은 거리는 걸어서 다니려고 노력한다. 스마트 폰이 있지만 가끔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직접 편지를 쓴다. 나는 그렇게 ‘강요된 편리함’ 보다는 ‘자발적 불편함’을 지향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조금 더 편하게 살게 해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편리함이 인간을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 편리라는 것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편리일 때는 더욱 그렇다. 없어도 상관없는, 아니 없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 편리함을 강요당하고 그 편리를 위해 과도하게 소비함으로써 점점 더 많은 행복을 잃어 가게 된다.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고 충만하게 해주었던 그 소소한 행복들 말이다. 잠시 추억을 더듬어 보자.
삐삐가 울릴 때 연인의 음성을 확인하러 공중전화로 달려가며 느꼈던 그 설렘과 행복은 편리한 핸드폰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글자씩 꾹꾹 눌려 편지를 쓰던 그 두근거림의 시간을 빼앗아 간 것은 그 편리한 컴퓨터 아니었던가. 길가에 핀 5월의 꽃을 보며 느낄 수 있었던 행복감을 빼앗아 간 것이 바로 편리한 승용차 아니었던가. 강요된 편리함 때문에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잃어버린 게다. 그뿐인가? 그 강요된 편리함을 소비하기 위해 언제나 정신없이 더 많은 노동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또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자발적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하고 싶다. 어떤 이는 “그런다고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따져 물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그런 소소한 자발적 불편을 감내한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지 않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거대한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맞서 사회운동이나 정치를 할 능력도 용기도 내겐 없다. 그래서 내가 가진 능력과 용기의 한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결코 무의미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자발적 불편함’을 감내하는 일상적인 변화들은 개인적 차원은 물론이고 사회적 차원에서도 유의미하다. 개인적 차원에서 집에서 음식을 해먹고 스마트 폰과 승용차를 쓰는 것을 줄이면 그만큼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또 누군가 음식점에서 종업원을 독촉하거나 다그치지 않는다면, 그 종업원 역시 소비자가 되었을 때 조금 더 배려심 있는 소비자가 될 것이란 측면에서 사회적으로 유의미하다. 일상생활의 혁명이 공허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시작하지 않는 혁명이야말로 공허하다.
심야버스 운행을 반대합니다.
폭주하는 자본주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돈을 더 벌어 더 편리해지려는 대신 자발적으로 조금 더 불편해지는 것은 어떨까요?" 그 불편함만큼 우리는 자본에서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지금의 병적인 자본주의를 완화하고 제어하기 위해서는 자발적 불편을 감내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소비자로서 자발적 불편을 감내하려고 할 때 조금 더 널널한 노동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이라 믿고 있다.
박원순 서울 시장의 정책에 대부분 동의하고 또 앞으로도 대체로 그럴 것 같다. 하지만 박원순 시장이 했던 정책 중 하나만은 마뜩치가 못하다. ‘올빼미 버스’라는 심야버스를 운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가 없다. 물론 그 선의를 모르는 바 아니다. 지하철도 버스도 끊기 시간에 서민들을 위해 조금 더 값싸고 편리한 버스를 도입하려는 그 선의를 어찌 의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선의와 관계없이 그 제도는 필연적으로 서민을 더 힘든 삶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다.
악덕 기업주는 ‘심야버스가 있으니 야근을 더 해도 되는 것 아니냐?’고 은근히 강요할 게다. 또 어떤 악덕 사장은 심야에 일하는 알바생에게 응당 주어야 할 교통비를 ‘심야 버스 타면 되잖아’라고 말하며 주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 이런 가정을 과도한 비약이라고 말하지 말자. 지금 우리를 둘러싼 자본주의는 그 정도로 충분히 치졸하고 천박하니까. 심야버스가 운행되면 당분간은 심야버스 덕분에 편리해지겠지만, 이내 그 제도는 더욱 서민을 옥죄는 제도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
정부차원의 정책적 제도는 폭주하는 자본의 문제를 뒤에서 수습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정부차원의 정책적 제도는 자본의 문제를 선제적이고 본질적으로 통제하고 제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막강한 권력을 틀어쥔 국가 정부마저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대체 누가 자본을 통제할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정부차원의 정책적 제도로서는 심야버스 운행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또 심야 배달도 하지 못하게 하는 편이 낫다. 또 술집이나 음식점도 24시간 운영이 아니라 밤 10시면 일괄적으로 문을 닫게 하는 편이 낫다.
물론 알고 있다. 거기에는 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다는 걸. 하지만 지금 잠시 불편하게 하게 그런 제도들이 정착되었을 때, 장기적 관점에서 우리는 조금 더 사람 냄새나는 사회에서 살 수 있게 될 게다. 많은 이들이 유럽의 선진국을 부러워하지만, 파비앙의 말처럼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유럽은 불편하게 짝이 없는 나라일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정부의 역할은 명확하다. 시민이 심야버스를 타는 편리함을 누리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심야버스를 탈 수밖에 없는 근본적 구조를 차단시켜주어야 한다. 그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어떤 이는 역정을 낼지도 모르겠다. 심야버스조차 없어서 서민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맞다. 당장이 힘든 삶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심야버스조차 없다면 삶이 얼마나 더 고되어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서민들을 위한 정책은 심야버스를 운행하는 것이 아니다. 최저임금을 높이던지, 고용안정성을 확보하던지, 기본소득을 보장하던지, 어떤 방법이건 심야버스를 타야 하는 일이 없는 사회구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흔한 정치꾼들의 입버릇처럼 나라가 망한다느니 국가 경제력이 없어진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기 전에 말이다.
우리 조금 불편하면 안 될까요?
우리의 역할도 있다.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당장은 조금 불편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을 시행하려고 할 때 기꺼이 손을 들어주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심야버스가 없으면 당장은 불편할 것이다. 밤 12시에 간편하게 소주 한잔 할 술집이 없다면 당장 불편할 것이다. 24시 편의점이 없어지면 당장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그런 불편함을 감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보다 조금 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게 될 수 있다.
우리는 분명 심야버스를 타는, 자정에 소주 한 잔하고 싶은, 새벽에 편의점을 가고 싶은 소비자다. 하지만 동시에 심야버스를 운전해야 하는 고달픈 운전수, 자정까지 서빙을 해야 하는 술집 종업원, 새벽까지 일을 해야 하는 편의점 직원이기도 하다. 잊지 말자. 우리의 편리함에 기생해서 자신의 몸집을 키우는 것이 바로 자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실 그 편리한 것들이 없으면 못살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심야버스, 심야술집, 24시 편의점이 없는 국가들이 실제로 많이 존재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네들의 삶의 질이 우리보다 훨씬 더 높다는 점이다. 인간의 행복은 ‘소비의 만족’보다 ‘노동의 고통’에 더 많이 영향을 받는다. 산술적으로도 그렇다. 소비하는 시간보다 노동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소비자로서의 만족보다 노동자로서의 만족이 우리 삶의 질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100만원을 버는데 쓰는 시간과 100만원을 버는 데 걸리는 시간 중 어느 시간이 더 많이 걸릴지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된다.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돈을 펑펑 쓰는 ‘행복한 소비자’이기보다 적게 일하고 사람답게 일하는 ‘행복한 노동자’가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소비자로서 불편해지는 만큼 노동자로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될 테니까. 소비자로서 불편하는 감내하는 만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각자의 삶에서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만큼 진정한 행복에 가까워질 게다. 마지막으로 부탁하듯 되묻고 싶다. ‘우리 조금 불편하게 살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