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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소비를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이 날조한 행복·불행의 이미지

소비를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소비를 자발적으로 줄일 수 있을까? 언젠가 친구에게 ‘지금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기 위해 소비를 하는 시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내게 이렇게 답했다. “나는 아닌데, 나는 물건을 살 때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질지는 생각 안 해. 물건 살 때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만 따져” 그는 신분이나 계급을 표현하기 위해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가성비‘를 따진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은 언제든 불필요한 소비를 자발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정말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일 수 있을까? 아닐 게다. 그는 돈이 없어서 가성비를 따질 수밖에 없는 형편인 것이지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소비의 제한을 강요당하는 것이지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돈이 없어 소비를 제한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자신은 가성비를 따져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사람이라고 끝끝내 포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만약 연봉을 10억씩 벌게 되어도 지금처럼 가성비를 따지는 '합리적인' 소비를 계속 할까? 아닐 게다. 아마 가격은 쳐다보지도 않고 이것저것 사다 모을 것이 분명하다. 괜한 허영부리지 말고 이것부터 분명히 하자. 우리는 소비를 자발적으로 줄일 수 없다. 돈이 없는 사람은 소비를 줄이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자발적인 게 아니다. 제한된 돈의 액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건을 사지 못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이걸 안사거나 혹은 조금 싸게 살 수 있다면 다른 것도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소비를 자발적으로 줄이는 것이 아니다. 강제적으로 소비를 제한 당하는 것이지.


 또 소비를 자발적으로 줄이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앞서 말한 궁상도 한 몫을 한다. 돈에 여유가 조금 있는 사람 역시 소비를 자발적으로 줄일 수 없다. 왜냐하면 소비를 줄이려고 할 때 자신이 구질구질하고 찌질하게 궁상을 떨고 있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매주 마다 비싼 식당에서 외식을 하던 사람이 소비를 줄이기 위해 집에서 음식을 해먹어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가족들이 모여 오순도순 음식을 해먹는다고 행복함을 느끼게 될까? 아마 아닐 게다. 십중팔구 그 놈의 돈의 돈 때문에 구질구질하게 집구석에서 음식을 해먹는 것이라 느끼기 일쑤일 게다.


 매사에 ‘가성비’를 따져야 하는 돈이 없는 사람은 항상 돈에 대한 결핍감을 안고 산다. 이런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돈에 여유가 있어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미 강요된 궁상을 내면화한 덕분에 소비를 줄이려고 할 때, 어김없이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고 서글프다고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돈에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 역시 소비를 자발적으로 줄이기는 만만치가 않다. 이제 암담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지긋지긋한 소비사회를 탈출할 방법이 정말 전혀  없걸까?

     

자본이 날조한 행복·불행의 이미지


방법을 한 번 찾아보자.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돈에 대한 결핍감 때문이다. 지금의 병적인 소비사회에서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꽤나 부유한 사람도 모두 돈에 대한 결핍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돈에 대한 결핍감은 대체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자본이 갖가지 매체를 동원해 확대재생산한 ‘소비=행복’이란 이미지가 그 기원이다. 그렇게 확대 재생산된 ‘소비=행복’이란 도식은 다시 ‘가난=불행’ ‘부유=행복’이라는 도식으로 파생되게 되었다. 우리가 가진 돈에 결핍은 여기서 시작된 셈이다. 


 하지만 '가난=불행' '부유=행복'은 삶의 진실이 아니다. 실제 삶에서는 돈이 조금 부족해도 행복하게 하는 사람도 많다. 또 돈이 아주 많아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돈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는 명제가 마치 진리인양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건 결국 ‘가난=불행’, ‘부유=행복’이란 이미지를 영화, 드라마, 광고, 잡지 통해 지속적으로 세뇌 받았기 때문이다. 그 세뇌 끝에 ‘가난=불행’, ‘부유=행복’이란 이미지가 무의식의 층위까지 파고 든 것이다. 자본의 그 집요한 세뇌 덕분에 비싼 외식 대신 집에서 음식을 해먹는 것은 구질구질한 불행으로 느끼게 된 것이고, 좁아터진 ‘마티즈’를 타고 하는 가족 여행은 안타깝고 불행한 것이라 느끼게 된 것이다.


 소비사회를 탈출하려면 자본에 의해 날조된, 이 세뇌 혹은 내면화를 극복해야 한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일 수도 없고 소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 소비를 줄이려고 할 때 마다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느껴지게 될 테니까 말이다. 소비사회 탈출의 핵심은 자본이 날조한 동시에 우리에게 이미 깊게 내면화된 행복·불행의 이미지를 얼마나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을 불행으로 느끼지 않고, 트럭을 타고 가족 여행을 하는 것을 불행한 삶이라 느끼지 않을 수 있을 때, 소비사회에서 탈출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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