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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예술가여! 새로운 행복의 이미지를 만들어 달라!

소비사회의 원죄는 예술가들에게 있다.

원죄는 예술가에게 있다.

‘가난=불행’, ‘부유=행복’이란 내면화를 기획하고 조장한 것은 자본이다. 하지만 자본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것은 자본의 논리에 복종한 일부 예술가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난은 불행이고 부유함은 행복이란 이미지는 어떻게 우리에게 각인 되었을까? 그것은 분명 자본에 복무하는 예술가들이 만든 광고, 영화, 드라마 때문이었다. 물론 ‘광고, 영화,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 예술가인가? 전문가인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잘 만들어진 광고, 영화, 드라마는 사람의 감정을 건드린다는 측면에서 그들을 전문가이기 이전에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자신이 만든 작품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사람이 바로 예술가니까 말이다.


 우리가 열광했던 그 수많은 영화, 드라마, 광고는 대부분 자본의 논리에 복종한 예술가들이 만든 것이었다. 그 영화, 드라마, 광고를 곰곰이 한 번 되짚어 보자. 영화 속에 여유 있고 행복해 보이는 여자 주인공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드라마 속의 매력 넘치고 근사한 남자 주인공은 아침에 조깅을 할 때 ‘나이키’ 운동을 신고 달렸다. 그뿐인가? 광고 속에 한없이 당당해보이고 자유로워 보이는 사람은 어김없이 ‘벤츠’나 ‘BMW’를 타고 ‘삼성’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일부 자본에 복종한 예술가들로 인해서 ‘나이키’ 운동화를 사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삼성’ 스마트 폰을 사야지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무의식중에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이키’ 운동화도, ‘스타벅스’ 커피도, ‘삼성’ 스마트폰도 살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 게다. 예술과 문화의 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 논리적인 설득은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는 있지만,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를 내면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감성적인 예술과 문화는 논리적으로 설득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무의식의 층위로 내면화시키는 힘이 있다.


 어느 사이엔가 소비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감성의 영역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그런 흐름 때문에 자본에 복종한 일부 예술가들이 문화, 예술을 소비를 부추기는 상품으로 끊임없이 만들어왔던 것이다. 사실 이쯤 되면 상업과 예술의 경계가 자체가 모호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음악·영화·드라마 등 상품화되지 않은 문화, 예술은 없을 정도다. 그 상품화된 문화, 예술 때문에 소비를 할 때 행복하고 소비할 수 없다면 불행하다는 암묵적인 도식을 내면화하게 된 게다. 소비사회를 탈출하지 못하게 된 원죄는 자본과 그에 공모한 예술가들에게 있다고 보는 것은 결코 비약이거나 과도한 해석이 아니다.


A라는 정념은 오직 그보다 강한 B라는 정념에 의해서만 극복된다.


‘결자해지(結者解之)’자라는 말이 있다. 묶은 놈이 풀어야 한다는 말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에게 ‘가난=불행’, ‘부유=행복’이라는 가치를 내면화 시키는 데 앞장 섰던 사람은 소수의 예술가들이다. 그러니 예술가들이 이 문제를 풀어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성급히 답을 구하기 전에 우선 ‘스피노자’라는 철학자를 만나보자. 스피노자는 자신의 저서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A라는 정념은 오직 그보다 강한 B라는 정념에 의해서만 극복된다” 


 ‘정념’이라는 생경한 단어 때문에 다소 난해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정념은 ‘감정에 의해서 억누르기 힘든 생각’이다. 크게 무리가 없으니, 쉽게 이해하기 위해 정념이라는 단어를 ‘감정’이나 ‘느낌’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그러면 이제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된다. 스피노자의 이야기는 이미 찾아온 A라는 감정은 그 자체로는 결코 없어지지 않으며 오직 A보다 더 큰 B라는 감정의 파문에 의해서만 A라는 감정은 극복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 통찰은 소비사회를 탈출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지금 소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결국 ‘가난=불행’, ‘부유=행복’이라는 도식이 반영된 이미지가 주었던 감정과 느낌 때문 아니었던가? 스피노자라면 ‘소비는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 혹은 ‘소비를 하면서 행복을 느끼지 말라!’는 말은 애초에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느낌(정념)은 그 자체로 극복되지 못하며 오직 그 보다 더 강한 느낌(정념)으로만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하며 이미 행복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말이다.


 너무도 옳은 이야기이지 않은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좋아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무 의미도 효력도 없다. 오직 그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더 설레게 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에만 처음 좋아했던 그 사람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소비로 행복해지려고 해서는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효력도 없다. 오직 소비할 때 느끼는 행복(정념)보다 더 큰 어떤 정념이 일어났을 때만 우리는 그 ‘소비=행복’이라는 허구적 도식을 깨뜨릴 수 있게 된다.


예술가들이여! 새로운 행복의 이미지를 만들어 달라!


바로 여기에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일 수 있는 비밀이 숨어 있다.‘소비는 행복하다’는 이미 우리 속에 각인된 그 정념보다 더 강렬한 정념을 누군가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일 수 있다. 당연하지 않나? 우리가 소비를 하는 이유는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 아니었던가? 그러니 소비를 하는 것이 사실 불행(정념)이고 또 소비보다 우리를 더 행복(정념)하게 해주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아는 것이 아니라) 된다면 당연히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일 수 있게 될 게다.


 바로 그 역할은 건강하고 훌륭한 예술가들이 해주어야 한다. 예술가가 누구인가?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과 느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사람들 아닌가. 물론 그런 역할을 해줄 예술가들은 자본에 복무한 예술가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 ‘결자해지’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감정과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예술가라는 큰 범주로 그 두 부류를 함께 묶을 수 있다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닐 게다.


 자본에 복무한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소비=행복’이라는 정념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많아져야 한다. 건강하고 철학이 있는 예술가들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얼마나 추악하고 끔찍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다큐멘터리·소설이 많아지면 어떻게 될까? 또한 자발적 가난이 얼마나 근사하고 멋있는 삶의 방식인지 보여줄 수 있는 영화·광고·연극이 많아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이는 것도, 더 나아가 소비사회의 탈출 역시 가능해질 것이라, 나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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