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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예술을 통해 소비사회를 탈출하자!

소비사회의 탈출을 위한 안목에 관하여.

예술을 통해 소비사회를 탈출하자

‘자본주의는 끔찍한 것이고, 부유함이 행복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며, 가난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고, 자발적 가난은 근사한 것’이라고 백날 떠들어 봐야 아무 소용없다. 백번 양보해서 논리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내면화된 ‘가난=불행’, ‘부유=행복’이라는 자본주의적 느낌은 결코 털어낼 수는 없다. 자본에 의해 왜곡된 감정과 느낌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강한 어떤 감정과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영화 한편, 소설 한편이 더 위력적이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A라는 정념은 오직 그보다 강한 B라는 정념에 의해서만 극복된다”고 말한 것일 테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머리를 때리는 이성에 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해서 그 아는 것들을 실천으로 옮긴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되돌아보면 금방 알게 될 일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가슴을 울리는 직관, 감정, 느낌에 있다. 그 직관, 감정, 느낌을 제대로 느끼기만 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훌륭한 예술작품을 제대로 만나기만 한다면, 자본과 그에 공모한 일부 예술가들이 세뇌시킨 ‘가난=불행’, ‘부유=행복’이라는 기만적 도식을 극복할 수 있다.


 소비사회를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면, 우선 좋은 예술을 접하자. 예술이라고 해서 클래식 같은 고상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그런 것에는 아직 관심이 없다. 하지만 둘러보면 예술 중에 우리의 흥미를 끌면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훌륭한 예술 작품들이 많다. 우선 그런 것들부터 시작하자.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 소설, 다큐멘터리 같은 것들로 충분하다.


 자본주의의 민낯을 보기 위해서는 열권의 철학책 보다 ‘변영주’ 감독의 영화, 「화차」(2012년)를 보거나, ‘조정래’의 소설, 「허수아비 춤」을 읽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자발적 가난이 얼마나 근사하고 멋있는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 백 마디 설명을 하는 것보다, 「서칭 포 슈가맨」(2012년, 말릭 벤젤롤 감독)이라는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를 한 편 보는 것이 훨씬 낫다. 우리네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한 번에 우리네 삶속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직관적이고 감정적인 예술작품이 우리네 삶을 변화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


 영화 ‘화차’, 소설 ‘허수아비 춤’,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가맨’이 그런 예술 작품이다. 이런 예술작품이 유용한 이유는 또 있다. 그건 재미다. 자본주의 극복이니 소비사회의 탈출이나 하는 골치아픈 이야기를 떠나 이 세 작품 일단 재미 있다. 골치아픈 논의를 위해서 아니라 그저 재미삼아라도 한 번쯤 볼만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재미로 그런 작품들을 보다보면 덤으로 어느 순간 조금씩 ‘소비=행복’이라는 자본주의적 내면 역시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일석이조는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이다.

   

안목을 기르자


그런데 어떤 이는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나는 세 작품 다 봤는데 별 감응이 없던데’라는 의문 말이다. 나 역시 비슷한 의문이 든 적이 있다. ‘화차’라는 영화를 아내와 같이 보았다. 나는 그 영화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화차’를 보고 ‘자본주의가 무엇일까? 정말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맞긴 한 걸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정작 아내가 영화를 보고 가장 감명을 받은 부분은 배우 김민희의 몸매였다. 아내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한 이야기는 “김민희 정말 말랐더라!”였으니까.


 같은 작품을 보고도 느끼는 것이 전혀 다를 수 있다. 차이가 무엇일까? 안목이다. 누가 더 영화를 잘 보았다 못 보았다는 하는 알량한 가치 평가를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안목만큼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한다. (아내의 ‘그럼 난 안목이 없다는 말이야!’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큰일이다.) 한 사람의 안목이 협소하다면, 그 사람은 똑같은 영화를 보고도 전혀 다른 느낌과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좋은 예술 작품을 찾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본에 복종한 나쁜 예술가들도 많지만 건강한 철학을 가진 예술가들도 많다. 그러니까 소비사회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실마리를 주고 있는 작품들은 앞서 말한 세 작품이외에도 찾아보면 더욱 많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그런 작품들이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역시 안목이 없기 때문일 게다. 내가 소비사회 탈출을 위한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예술작품을 겨우 세 개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안목이 그 정도인 게다.


 안목을 길러야 한다. 좋은 영화, 소설, 시, 다큐멘터리를 온전히 소화할 수 있는 안목은 물론이고, 또 기존의 자본주의적 내면화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예술작품을 찾아낼 수 있는 안목 역시 길러야 한다. 그때 비로소 자본주의가 왜곡시킨 기존의 내면을 무너뜨리고 각자만의 진짜 삶을 살 수 있는 내면을 확보하게 될 게다. 그때가 되면 더 이상 ‘더 많이 소비해야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소비사회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안목을 기르는 법, 철학과 친구


영민한 독자라면 또 의문이 하나 생길 법도 하다. ‘안목이 있으면 좋다는 것은 알겠는데 어찌하면 안목을 기를 수 있느냐?’는 의문 말이다. 말 나온 김에 안목을 기르는 방법까지 말해보자. 안목을 기르는 방법은 쉽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의문에 대해서 끈질기게 고민하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안목은 자연스럽게 생기게 마련이다. 의심하고 사유하는 습관을 기르는데 효과적인 방법은 단연, 철학이다. 철학이라는 것 차제가 기존의 관습이나 체제에 대해서 과감하게 괄호를 쳐서 의문을 제기하고 사유했던 흔적인 까닭이다.


 하지만 안다. 쉽지 않다는 것. 일상에서 밥벌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철학이라니!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니 안목을 기를 수 있는 조금 더 현실적인 대안을 하나 더 말해보자. 내가 안목을 기를 수 없다면, 주위에 안목이 있는 사람을 곁에 두면 된다. 나 역시 그랬다. 직장을 다닐 때는 안목을 기르기는커녕 퇴근 후에는 육아에 정신없었고, 주말에는 다음 주 업무를 위해서 에너지를 충전하기 바빴다. 하지만 직장을 다닐 때 하나 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위에 안목이 있는 친구들과 종종 연락을 하며 지냈다는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안목이 있는 친구와 한 달에 한번은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럴 때 마다 안목이 있는 친구는 몇 가지 영화, 다큐멘터리, 음악 그리고 좋은 책을 권해주었다.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지금에서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친구가 추천해주었던 작품들을 하나씩 접해나갈 때 마다 나의 안목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안목이 성장함에 따라 나는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갔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옆에 안목 있는 친구가 있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안목을 기를 형편이 안 된다면 안목 있는 사람을 주위에 두자. 그리고 그와 종종 교류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크게 에너지를 쓰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안목도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안목이 성장하다보면 같은 영화를 보고도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고,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좋은 작품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좋은 작품을 온전히 소화하고, 그런 좋은 작품을 직접 찾아낼  있다면, 집요하게 소비하게 만드는 내면과도 영영 굿바이다. 그때 자본의 꼭두각시로서 아니라 진짜 행복을 만끽하는 주인의 삶을 살 수 있다. 소비사회의 탈출은 그렇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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