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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면, 행복해질까?

‘오늘’ 그리고 ‘지금’을 살자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시대


“야, 주말에는 좀 쉬어, 그러다 몸 상하겠다.”
“아니야, 젊었을 때 열심히 해놔야지 나중에 행복하게 살지”


 언젠가 친했던 직장 동료와 나눴던 대화였다. 그는 주중에는 회사 일에 혹사당했고, 주말에도 자격증, 영어공부를 하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런 그가 걱정이 되었고 주말이라도 제대로 쉬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지금 고생해야지 나중에 행복하다’고 말하면서 고된 일상을 지속했다. 끊임없는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TV를 보는데, 고3 교실에 붙은 급훈이 나온 적이 있다. 그 급훈은 ‘지금 공부하면 미래의 아내 얼굴이 바뀐다!’였다. 함께 TV를 보던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했지만, 나는 웃을 수만은 없었다.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은 당연히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를  나 역시 너무 어린 나이부터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우리 사회는 항상 ‘미래를 위해 지금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강요한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시대를 살고 있다.


 소비사회의 탈출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미래’가 아니라 ‘지금’을 살겠다고 마음먹을 때 가능하다. 의아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그 집요한 소비욕구를 자제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내일·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니까. 지금 사고 싶은 것도 참고, 지금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지금 놀러 가고 싶은 것을 참아야 결혼도 할 수 있고, 집도 장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가진 너무나 익숙한 사고방식 아닌가? 미래에 대한 기대 혹은 희망이 있을 때야 겨우 지금의 방탕한 소비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내일'이 아니라 '오늘', '미래'가 아니라 '지금'을 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자칫 방탕한 소비로 인생을 탕진하게 될까봐서. 그러니 ‘소비사회의 탈출은 오늘·지금이 아니라 내일·미래에 집중할 때 가능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돌려 말할 것 없이 이것은 분명 어리석은 생각이다. 정작 소비사회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건 미래와 내일에 과도하게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납득할 수 없겠지만, 진정으로 '지금' 그리고 '오늘'을 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만이 집요한 소비사회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전세 집을 전전하는 월급쟁이 가장이 있다. 그의 꿈은 당연히 내 집 마련이다. 2년마다 ‘다음에는 어디로 이사 가야하나?’라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내 집을 갖는 것이 꿈이다. 당연히 그 꿈은 ‘지금·오늘’ 아니라 ‘미래·내일’ 이루어질 일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비사회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빤한 월급에 집을 장만하려면 ‘오늘’ 가족여행은 고사하고, ‘지금’ 가족들끼리 오붓하게 식사를 하는 일도 사치스럽게만 느껴질 게다. 오직 집을 장만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테니까.


 그래, 그렇게 10년을 고생해서 겨우 집한 채 장만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제 그들은 행복할까? ‘지금·오늘’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닐 게다. 집은 장만했으니 이번에는 남부럽지 않은 승용차 정도는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또 다시 ‘오늘·지금’을 희생하기 시작할 게다. ‘미래·내일’에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오늘·지금’을 살 수 없다. 집착했던 ‘내일·미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늘·지금’이 된다. 그리고 그 ‘오늘·지금’은 다시 ‘내일·미래’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시간이 되고 만다 오직 ‘내일·미래’만을 보고 사는 사람은 그 불행의 사이클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지금·오늘’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미래·내일’만 존재할 뿐이다.


‘오늘’ 그리고 ‘지금’을 살자!

이것부터 분명히 하자. 소비사회의 탈출은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소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오늘’ 그리고 ‘지금’을 사는 데 있다. 집을 사기 위해, 자동차를 사기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삶은 억지스럽게 소비를 억제하도록 기능하겠지만, 소비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지는 못한다. 아니 오히려 소비에 대한 욕구가 억눌리면 억눌릴수록 소비에 대한 욕구는 점점 더 커져만 갈 것이다.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의 말처럼 ‘인간은 언제나 금지된 것을 더욱 욕망’하게 마련이니까.


 ‘오늘’을 살아야 한다. 당장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한다. 어떤 경우라도 ‘오늘·지금’을 수단화해서는 안 된다. 소비 역시 마찬가지다.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소비를 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살면 방탕하고 과소비를 하게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늘’을 살고, ‘지금’부터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결코 방탕해지거나 과소비를 하는 법이 없다. 집을 사려는 이유가 뭔가? 자동차를 사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행복지기 위해서 아니던가?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 집을 사려고 했고, 연인과 데이트를 하고, 가족들과 여행을 가기 위해 자동차가 필요했던 것 아닌가?


 하지만 집과 자동차를 소유함으로써 누리게 될 행복은 언제나 ‘미래·내일’의 일이다. 여기서 분명한 점은 그 ‘미래·내일’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지금·오늘’ 돈에 쪼들리느라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오늘’부터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미래’에 집을 살 돈으로, ‘내일’ 자동차를 살 돈으로 ‘지금’ 가족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할 것이고, ‘오늘’ 연인과 기차를 타고 행복한 여행을 떠날 게다. ‘오늘·지금’부터 행복하려는 사람이 방탕하고 과소비를 하며 사는 법은 없다.


 진지하게 ‘오늘’을 살려는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고 검약하게 살 것이다. 당연한 일 아닌가? ‘오늘’을 살려는 사람은 안다. 일하지 않고 방탕하게 살고, 쓸데없는 곳에 과소비를 한다면 ‘지금’ 그리고 ‘오늘’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오늘’을 살려는 사람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건강하게 일하고, 훨씬 더 건강하게 절약하며 살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바로 ‘지금’ 그리고 ‘오늘’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말이다.


 두 가지 삶이 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삶‘오늘’ 소중한 사람들과 소박한 여행을 떠나는 삶. 두 가지 삶 중 어떤 삶이 더 행복할까? 어떤 삶이 더 방탕한 것일까? 어떤 삶이 더 과소비하는 삶일까?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소비사회의 탈출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의연히 감당하면서 ‘오늘’을 살고, ‘지금’ 행복하겠다고 강건하게 다짐하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당연히 희생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언제나 소비에 대한 결핍감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 그 결핍감이 바로 소비사회라는 감옥의 창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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