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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강요된 궁상 VS 당당한 궁상

당당한 궁상은 건강한 소비 철학이다.

1. 강요된 궁상

궁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궁상이 있다. 우선은 ‘강요된 궁상’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궁상스럽다’라고 할 때, 느껴지는 부정적인 감정은 대부분 이 강요된 궁상인 경우다. 앞서 말한 친구와 아이의 옷을 얻어온 지인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다. 이 강요된 궁상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시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자신을 어찌 볼 것인가에 집착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 강요된 궁상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다.      


 내 친구가 한적한 고깃집에서 느낀 씁쓸함은 근본적으로 타인의 시선에서 기원한다. ‘돈벌이도 시원찮은 백수 둘이서 고기 한 번 먹어 보겠다고 지하철을 한 시간이나 타고 오는 모습을 타인은 어떻게 볼까?’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이 궁상스럽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선배에게 아이들 옷을 물려받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가 누런 아이 옷을 보며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다고 느끼고 스스로 궁상스럽다고 느낀 이유는 ‘돈이 없어서 아이들 옷도 얻어 입히는 자신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바라볼까?’라는 생각에 때문인 게다.


 이것은 분명 강요된 궁상이다. 누가 강요했느냐? 두 번 물을 필요 없이 매체와 공모(共謨)한 자본이다. 그 수많은 광고, TV, 드라마에서 암묵적으로 보여주었던 이미지는 ‘새 것은 행복, 헌 것은 불행’ 혹은 ‘비싼 것은 행복, 싼 것은 불행’이라는 도식이었다. 행복해 보이는 모습은 언제나 산뜻해 보이는 비싼 새 것을 가지고 있었고, 불행해 보이는 사람은 언제나 너덜너덜해 보이는 싼 값의 중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미지에 너무 오래, 너무 자주 노출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궁상이 처량하고 찌질한 것이라고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강요된 궁상=자기연민+피해의식


 강요된 궁상은 본질적으로 ‘자기연민’에 ‘피해의식’이 더해져서 만들어지는 감정이다. 매체와 공모한 자본이 만들어 놓은 궁상이라는 프레임을 내면화했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비싼 제품이나 새 것을 살 수 없다면,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게다. 내 친구가 맛있는 고기를 먹고도 스스로 궁상맞다고 느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이 옷을 얻어온 지인이 왜 스스로를 궁상스럽다고 느꼈을까?


 맛있는 고기를 먹고도 자신이 궁상스럽게 느낀 이유는 고급 레스토랑에 가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다는 ‘자기연민’과 와인에 스테이크를 먹는 누군가를 보며 느낀 ‘피해의식’ 때문이었을 게다. 아이 옷을 얻어온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가 스스로 궁상맞다고 느낀 이유는 ‘나는 아이들 옷도 맘껏 사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구나!’라는 자기연민과 ‘누구는 아이들에게 매일 새 옷을 사다 입히던데’라는 피해의식 때문이었을 게다.


 만약 우리가 강요된 궁상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것은 가난하게 사는 영화, 드라마 속의 인물을 보며 ‘진짜 구질구질하게 사네!’라고 무심히 했던 말 때문일 게다. ‘진짜 구질구질하게 사네!’라고 했던 그 말이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 비수처럼 박힐 때, 우리는 강요된 궁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가난에 대해 구질구질하다고 폄하하고 무시했던 바로 그 시선으로 타인이 우리를 바라보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강요된 궁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일하게 된다.


2. 당당한 궁상

또 하나의 궁상이 있다. ‘당당한 궁상’이다. 이것은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급적 돈을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일정 정도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해주어야 함’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돈을 적게 쓰면 적게 벌어도 되고 이는 곧 타인이 원하는 일은 적게 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나는 종종 궁상스럽게 산다. 타인이 원하는 일을 적게 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많이 하기 위해서.


 정직하게 말해, 나 역시 한 동안은 당당한 궁상을 긍정하지 못했다. 평일 날에 도서관에 가면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많다. 그들 옆에 앉아 글을 쓰면서 ‘젊디 젊은 놈이 평일 대낮에 노인네들과 앉아서 뭐하는 짓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내 신세가 처량하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혼자 앉아서 도시락을 꺼내 먹으면서 ‘이게 무슨 찌질한 짓인가’라는 생각도 수시로 들었다. 하지만 이제 안다. 당당한 궁상은 구질구질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한심스럽게 여겨야 할 일은 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궁상이라는 것이 무조건 돈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당한 궁상은 돈을 ‘잘’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이다. 돈을 잘 쓴다는 것은 많이 쓴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음식을 ‘잘’ 먹는다는 것이 ‘많이’ 먹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급적 하루에 1만 원을 넘게 쓰지 않는다. 거창하게 목표를 세운 것은 아니다.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다 보니 크게 무언가가 사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기도 하거니와 교통비나 커피 한 잔 정도가 내가 하루에 쓰는 돈에 전부이기 때문이다.


당당한 궁상은 건강한 소비 철학이다!


하지만 나는 가족들과 여행을 가거나 함께 식사를 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또한 아이들에게 영화, 연극, 뮤지컬을 보여주거나 책을 사주는 데에는 역시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 고마운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사주거나 좋은 음식을 대접하는 데도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 밥을 먹거나 술 한 잔을 할 때 가급적 내가 돈을 낸다. 나는 분명 돈을 많이 쓰지는 않지만, 내가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에는 ‘잘’ 쓰는 편이다.


 쉽게 말하자면, 당당한 궁상은 적게 쓰고 적게 번다는 자신만의 소비 철학이다. 당당한 궁상은 돈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비 철학에 기반해서 돈을 쓴다는 걸 의미한다. 안 쓸 때는 궁상스럽게 안 쓰기도 하지만, 써야 할 때는 당당하게 흔쾌히 돈을 쓰는 것이 바로 당당한 궁상이다. 소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절대적 돈의 액수의 문제가 아닌 경우가 더 많다. 돈을 쓰고 싶은 곳과 쓰고 싶지 않은 곳을 자신의 철학으로 스스로 정하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궁상을 떠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소비에 시달리는 경우가 더 흔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타인의 시선 갇힌 ‘강요된 궁상’에 시달리며 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앞으로도 더 당당하게 궁상을 떨며 살 것이다. 집필실을 갖기 위해, 차를 갖고 다니기 위해, 매일 비싼 점심을 먹기 위해 억지스럽게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지 않다. 더구나 불필요하게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하고 싶지도 일을 더 많이 하며 살아야 하는 삶은 끔찍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차라리 나는 적게 벌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 위해 당당하게 궁상스러운 삶을 살겠다. 그렇게 소비로부터 자유롭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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