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상에 관하여
궁상을 떤다는 것
“직장을 그만두니 좋네, 이렇게 너랑 평일에 낮술도 한잔하고”
“좋기는 하네, 근데 백수 둘이서 싼 고깃집을 찾아다니는 게 좀 서글프기도 하다”
친한 친구가 한 명 있다. 직장을 그만두면 꼭 그와 평일에 맛있는 고기에 낮술을 한 잔 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드디어 소원을 성취했다. 괜찮은 고깃집을 찾았고 거기서 그와 낮술을 한잔했다. 그날 정말이지 행복했다. 평일 날 지하철을 타고 낮술 한 잔을 하러 가는 여유도 너무 좋았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좋았다. 게다가 기분 좋을 정도로 취해서 고깃집을 나설 때, 코끝을 간질거리던 그 초가을의 냄새까지. 어느 영화 제목처럼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느껴졌다.
나만큼은 아니었을지라도 분명 그도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음 한편 조금 찜찜했었나 보다. 그 찜찜함의 정체는 분명 궁상이었을 게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조직을 떠나 혼자 밥벌이를 하니 수입도 일정치 못했고, 그로 인해 종종 생활의 곤궁함에 빠지곤 했다. 일찍 성공해서 돈을 잘 버는 친구들을 볼 때면 상대적 박탈감 또한 느꼈을 게다. 그는 백수 둘이서 싼 고깃집을 찾아 서울에서 경기도의 한적한 곳까지 오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는 백수 둘이서 싼 고깃집을 찾아다니느라 궁상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날 그는 분명 나만큼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자신의 처량함 혹은 궁상 때문에. 이 궁상이란 것은 소비라는 것을 숙고할 때 아주 중요하다. 능력 있고 야심 있는 사람들이야 남들과 구별 짓기를 통해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소비에 시달리지만 평범하거나 소박한 사람들은 조금 다르다. 평범하거나 소박한 사람들은 찌질하게 궁상을 떨며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비에 시달린다. 이처럼 궁상은 소비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테마다.
지인 중에 “이제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아이들 옷은 얻어 입히지 않을 테야!”라고 언성을 높였던 사람이 있다. 내용인즉슨 아는 선배에게 아이들 옷을 얻어 왔는데, 그중 몇 개가 누런 얼룩이 있는 지저분한 옷이었던 것이다. 지인은 그 옷을 보며 “사람을 뭘 로 보고, 진짜 없이 산다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이제 내가 더 벌어서 애들 옷 사 입히고 말지”라고 말했단다. 자신의 선배가 준 옷 중에 깨끗하고 좋은 옷도 많았음에도 과도하게 역정을 내고 불쾌했던 이유는 스스로 자신이 궁상을 떨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게다.
두 가지 궁상
나 역시 궁상떨며 살고 싶지 않다. 또 누군가 지질하게 궁상을 떠는 것도 보기 싫다. 친구들과 술 한 잔 먹고 계산대 앞에서 쭈뼛거리는 궁상도 싫고, 생활이 빠듯하다는 핑계로 힘든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몇 천 원조차 아까워하는 궁상도 싫다. 직원들을 해고시키면서 ‘나도 먹고살아야지’라며 엄살에 가까운 궁상을 떠는 사장은 더욱 꼴 보기 싫다. 나 역시 궁상맞게 살고 싶지 않다. 정당하게 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쓰고 싶은 곳에 당당하게 돈을 쓰며 살고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어떤 이는 내게 궁상맞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는 사람이 마땅한 집필실도 없어, 아침에는 카페에서 오후에는 도서관을 전전하며 글 쓰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게다. 나에게 궁상스럽다고 말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집필실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점심도 가급적 사 먹지 않는다. 가능하면 전날 집에서 간단하게 도시락을 준비해서 혼자서 먹는 일이 다반사다. 맞다. 이런 모습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지리 궁상맞아 보일 법하다.
하지만 궁상이라고 다 같은 궁상은 어니다. 엄밀히 말해 궁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궁상이 있다. 이 두 가지 궁상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두 가지 궁상의 구분으로 소비에 관한 조금 다른 철학을 세울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일반적으로 찌질하고 처량스럽게 여기는 궁상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논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