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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소비의 집요함!

자본의 교활함과 소비의 집요함에 관하여.

소비될 것 같은 것은 모조리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주의

소비의 집요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는 거의 자가발전 수준으로 끊임없이 소비는 강요된다.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무분별한 자연 파괴가 횡횡했고 그로 인해 당연히 환경은 나빠졌다. 하지만 자본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기는커녕 자신이 야기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또 다른 상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깨끗한 물과 심지어 상쾌한 공기마저 돈으로 사야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물과 공기를 더럽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자본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장본인이 다시 깨끗한 물과 공기를 팔아 다시 이윤을 축적하고 있는 게다. 이건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패고, 그 때문에 그 사람이 아프니까 다시 약을 팔아야 한다는 협잡꾼과 무엇이 다를까? 자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응시할 수 있다면, 지금 상황이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러운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협잡꾼 같은 자본은 소비될 것 같은 것은 모조리 상품으로 만든다. 이런 식의 소비의 강요는 물, 공기와 같은 자연의 상품화로만 끝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과도한 경쟁을 부추기고 유발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각박한 세상을 사느라 사람은 이제 정말이지 지쳐버렸다. 놀랍게도 자본주의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으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 ‘사랑’이라는 가치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에 지쳐버린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해서 말이다. 자본주의가 첨예해지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더욱 목을 매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직 경쟁만이 남은 지금의 냉혹한 자본주의 시대에 사랑이라는 가치가 남아 있을만한 곳은 혈연집단인 가정뿐이란 사실을 직감한 까닭이다.

사랑마저 상품이 되는 시대


사람들의 이런 절박한 갈증을 자본이 그냥 넘어갈리 없다. 자본은 사랑마저 상품으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상품이 바로 ‘생명보험’이다. 생명 보험이 무엇인가? 내가 죽어야지 돈이 나오는 보험 아닌가? 그런데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인데, 그런 보험을 왜 든단 말인가? 생명 보험을 파는 친구가 있다. 그가 보험을 팔 때, 논리는 이렇다. ‘당신은 죽지만 남은 가족들은 잘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그 정도의 사랑은 남겨두고 떠나야 하지 않겠어요?’ 


 자본주의에 찌들어 이제 남은 것은 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생명보험 논리는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가족 사랑의 논리에 약간의 감성적인 어법을 더해 생명 보험 가입을 권유하면 그것을 뿌리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 자본은 사랑마저도 보험이란 형태로 팔아먹는다. 사랑마저 상품으로 만들어 집요하게 소비를 강요하는 것이다. 


 요즘 들어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가 극심해짐에 따라 무엇인가 돈 이외에 가치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요구에 맞춰 문학이나 철학 관련 책, 강연이 봇물 터지듯 상품으로 쏟아져 나오게 된 것이다.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고 피폐하게 만든 바로 그 자본주의를 피하고자 했던 곳에서 조차 자본이 만든 상품이 도사리고 있는 것 아닌가. 젠장, 정말 피할 곳이 없다.


 ‘체 게바라’가 프린팅 된 옷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을 볼 때 적잖이 당황스럽다. 자본주의는 ‘체 게바라’마저 상품이 된다면, 철저하게 이용한다. ‘체 게바라’가 누구인가? 무장 혁명을 불사할 정도로 급진적인 정치가이자 혁명가 아닌가! 쿠바의 혁명 아이콘이 바로 체 게바라다. 체 게바라의 혁명 정신이 제대로 이해되기만 한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위태로울 수도 있건만 자본은 그런 것조차 개의치 않는다. 체 게바라 아니라 김일성이나 김정일, 김정은도 소비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라면 상품으로 만들게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드는 것, 그게 자본주의다.


자아까지 분열하게 만드는 소비


소비의 집요함이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면 심각한 오판이다. 이제 제국주의 시절은 이미 지났으니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해서 소비시장을 확대할 수 없다. 하지만 자본은 결코 소비의 강요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본은 이제 소비시장을 확대하고, 상품의 소비를 더욱 촉진시키기 위해 심지어 우리의 자아마저 분열시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가 분열되기 시작했다. 정신병까지는 아니지만, 일정 정도 우다들 자아분열을 겪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궤변이 아니다. 지금 우리네 삶을 한 번 곰곰이 돌아보자.


 한 여성이 있다. 그는 한 남편의 아내이고, 두 아이의 엄마이고, 직장에서는 커리어 우먼이다. 자본은 이런 한 여성이 가지는 몇 가지 역할 모델을 토대로 자아분열을 조장한다. 우선 갖가지 상품, 예를 들면 구두·목걸이 같은 상품을 광고함으로써 아내이자 여자로서의 아름답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그리고 믹서기·칼·냉장고·청소기 같은 주방‧가정용 상품으로 훌륭한 아내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뿐인가? 세련된 정장, 가방 같은 상품으로 커리어 우먼의 욕망을 자극한다. 자본은 더 많이 소비시키기 위해 한 사람의 자아까지 산산이 쪼개 놓는 것이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자본은 ‘남편’, ‘아빠’ 그리고 직장에서 ‘팀장’, 테니스 동호회 ‘회원’으로서의 자아를 끊임없이 분열시킨다. 남편, 아빠, 팀장, 동호회 회원이라는 자아가 통합되어 있을 때의 소비가 1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 남자의 정체성을 산산이 쪼개어 자아를 분열시킨 후에는 소비가 4 아니 5, 6도 될 수 있다. 생각해보자. 근사한 남편이 되기 위해 소비해야 할 상품이 있고, 멋진 남편이 되기 위해 소비해야 할 상품이 있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직한 팀장이 되기 위해 소비해야할 상품 또한 널려 있지 않은가?


자본의 교활함! 소비의 집요함!


 자본은 광고와 갖가지 매체를 동원해 한 사람의 내면을 산산이 쪼개고 있다. 훌륭한 아빠와 멋진 남자의 내면을 쪼개는 것이 자본이다. 광고와 잡지에서 훌륭한 아빠는 언제나 널찍한 캠핑카를 몰고 다닌다. 하지만 그 다음 광고와 그 다음 페이지 잡지에는 멋진 남자가 문짝 두 개가 달린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럼 어찌 되겠나? 분명 우리는 훌륭한 아빠가 되기 위해 캠핑카를 사고, 또 멋진 남자가 되기 위해 스포츠카를 사고 싶다는 소비욕구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급기야 자아가 완벽히 분열되고 거기에 불운(?)하게 돈까지 많다면, 우리는 불필요한 자동차를 두 대를 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 방송된 어느 SUV 자동차 광고가 인상적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탈 때는 훌륭한 아빠가 되고, 혼자 탈 때는 속도가 잘나는 멋진 남자가 타는 차’라는 식의 광고였다. 경기가 안 좋은 요즘에는 자본은 역으로 공격해 들어오기도 한다. 자본이 집요하게 쪼갠 자아를 다시 통합함으로써 그것이 합리적인 소비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SUV 자동차를 한 대 사면 두 가지 자아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 광고의 핵심 메시지인 것이다. 우리 역시 ‘조삼모사’의 원숭이를 어리석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다. 자본은 경기가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언제나 소비를 강제할 수 있는 갖가지 방법들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자본은 그만큼이나 집요하게 우리의 소비를 강요하고 강제한다. 이쯤 되면 자본이 기만적이고 교활하다고 느끼기보다 섬뜩하고 무섭다고 느껴지는 것은 정말 나뿐인 걸까? 우리가 자유롭게 소비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전에 우리의 내면과 우리를 둘러싼 자본의 민낯을 한 번쯤 진지하게 되돌아 볼 일이다. 월급이 통장에 잠시 스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자본의 교활함! 소비의 집요함! 행복한 밥벌이를 하고 싶다면, 그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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