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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우리는 자유롭게 소비한 적이 없다.

소비를 강요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 : 불안, 흉내 내기, 구별짓기

우리는 자유롭게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김 대리, 새로 자동차 샀다며? 요새 쪼들린다더니?”
“네, 그냥 사고 싶어서 샀어요.”     


“어, 너 그것 못 보던 목걸이다? 그런데 그 비슷한 거 있지 않았어?”
“맞아, 비슷하긴 한데, 사고 싶어서 하나 샀어.”

 

 위 대화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게 소비한다고 생각한다. 돈만 있다면, 자신에게 상품을 살 수도 혹은 사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권이 있다고 여긴다. 누군가 총, 칼을 들이 밀면서 돈을 쓰라고 겁박하지 않은 한 우리는 자유롭게 소비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실일까? 정말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자유롭게 소비하고 있는 것일까? 의아스럽게도 쉽게 장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놈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자본주의는 총, 칼을 들지 않았을 뿐, 언제나 우리에게 무자비하게 소비를 강요한다. 어쩌면 우리는 자본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소비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본은 우리가 돈을 들고 있는 꼴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돈을 써야 자본주의가 원활하게 작동하고, 그래야만 자본은 스스로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돈 가지고 안 쓰면 그만이지 소비당하는 건 뭐야?’라고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 자본이 얼마나 집요하게 소비를 강제하고 강요하는지 구체적으로 점검해보자.


1.불안


자본은 인간의 불안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소비를 집요하게 부추긴다. 아니 이것은 부추김 정도가 아니라 협박에 가깝다. 내가 겪은 실제 사례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종종 아들과 어린이 채널을 함께 보곤 한다. 어느 날 그 채널에서 아이들 보험 상품을 광고가 나왔다. “어린 아이들은 자주 다쳐요”, “치료비가 만만치가 않아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라며 아이 엄마들끼리 둘러 앉아 수다를 떠는 컨셉의 광고였다.


 한 눈에 딱 봐도 작위적인 광고였지만, 그 광고를 보면서 평소에는 하지도 않았던 수많은 걱정이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닌가? 평소 아이가 놀이터에서 위험하게 뛰어다녔던 장면도 생각나면서. 나름 자본주의에 대해 이것저것 공부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그 광고로 인해 나는 여지없이 불안해졌다. 자칫했으면 전화기를 들어 보험가입을 할 뻔했다. 자본은 늘 이런 식이다. 자본은 인간이 가진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감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확대 재생산한다. 그런 후에 그 불안을 해소해주겠다며 은근슬쩍 상품(보험)을 꺼내는 식이다.


 뿐만 아니다. 동창회에 나가서 친구가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말없이 자신의 자동차를 보여주었다’고 말하는 자동차 광고 있다. 이 광고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 나이 될 때까지 이정도 자동차도 없으면 어떻게 하냐?’라고 암묵적으로 겁박하는 셈 아닌가? 이런 교활한 광고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지하철을 타고 동창회에 갈 때 동창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을까 불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좋은 남자친구가 되려면 이 정도는 사야 된다.’ ‘사랑받는 여자 친구가 되려면 이 정도는 사야 된다.’는 식의 광고는 굳이 찾지 않아도 이미 너무 흔하다. 그런 광고는 모두 우리의 불안을 자극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쪽으로 기능한다. 특정한 상품을 소비하지 못 할 때 불안해진다. 연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예감 때문에. 이처럼 자본은 미래에 대한 불안뿐만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안까지 이용해 집요하게 소비를 강요한다. 불안을 이용해서 소비를 강요하는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맞벌이를 하지만 비정규직인 탓에 형편이 그다지 좋지 못한 부부를 알고 있다. 그네들은 자신의 소득 수준으로는 보내기 버거운 영어 유치원에 아이를 보낸다. 왜 그럴까? 그 유치원 광고 전단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영어,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영원히 늦습니다!’ 혹여 아이가 공부를 못해 지금 자신들이 사회로부터 받고 있는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불안한 것이다. 그러니 그 비싼 회비를 내고 심지어 아이가 그다지 원하지도 않는 영어 유치원에 기를 쓰고 보내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은 미래, 타인, 자녀 등 동원 가능한 모든 방법을 이용해 불안을 확대 재생산해 치밀하고 집요하게 소비를 강제하고 강요한다.


2.흉내 내기


인간은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흉내 내려는 욕구가 있다. 이것은 아이를 키워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아이들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의 흉내를 낸다. 말투, 어휘는 물론이고 제스처까지. 그래서 ‘애들 앞에서 찬물도 못 마신다’는 속담이 나온 것일 테다. 이 본능에 가까운 모방욕구에 자본은 역시나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것은 매력적인 스타들에게 왜 그리 협찬이 많이 붙는지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매력적인 스타를 흉내 내려는 욕구는 결국 그 스타가 입었던 옷, 신발, 악세사리의 소비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중가요나 드라마 혹은 영화가 히트가 되고 나서 강남이나 명동을 나가면 정말 가관이다. 한때 황신혜 스타일, 이효리 스타일, 박신혜 스타일 등 노골적으로 특정 스타를 내세워 상품을 팔기에 여념이 없었다. 스타를 흉내 내기 위한 대중의 모방욕구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해냄으로써 소비를 집요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누구누구 스타일이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게 되면, 이제 그것은 소비의 ‘자극’이 아니라 ‘강제’가 되게 마련이다. 유행하는 옷, 신발, 팔찌, 목걸이는 하나쯤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아이템’이 되어 버리니까 말이다.


 한국에서 ‘노스 페이스’라는 등산용 점퍼가 불티나게 팔린 적이 있다. 여기에는 웃지 못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점퍼를 산 것이 아니라 고등학생들에게 그 점퍼가 필수 아이템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스타가 아니어도 좋다. 특정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만족감을 주는 흉내 내기로서 소비는 집요하게 강제되기도 한다. 실제로 노스 페이스 점퍼가 없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었다니, 이쯤 되면 소비를 어찌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강제나 강요에 다름 아닐 게다. 


3.구별 짓기


언젠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전에 광고가 나왔다. 노랑, 분홍색으로 미려하게 디자인된 디지털 카메라 광고였다. 그 광고의 슬로건은 “꺼내고 싶은 카메라, 훔쳐보고 싶은 카메라”였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이제는 광고가 아예 대놓고 사람의 구별 짓기 욕망을 건드리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의 주요 기능인 화소나 편리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다 그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사람들에게 주목받을 수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판매 포인트로 내건 것이다.


 그 광고를 통해 자본의 집요함을 또 알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구별 짓기’라는 욕망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모방본능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이라면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지음으로써 주목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예외는 거의 없다. 심지어 ‘나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초야에 묻혀 살고 싶다’는 내용의 책 쓰는 철학자들조차 자신의 책에 본인의 이름만은 꼭 기록해 두고 싶어 하니까 말이다. 분명 구별 짓기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자본주의가 초장기 그 외연을 확대하던 시기에 내걸었던 단어가 있다. 바로 ‘개성’이다. 자본은 개성적인 존재가 매력적인 존재라고 끊임없이 외쳐댔다. 그 덕분에 이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신발을 신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흉내 내는’ 상품에 대해서는 다소 시큰둥해진 것이 사실이다. ‘난 소중하니까!’를 연신 외치는 사람은 이제 싸구려 흉내 내기 대신 자신만의 개성을 발현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이 개성이라는 것은 사실 냉정히 말해 소비의 촉진제일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비슷한 청바지에 지퍼의 위치를 바꾸고 색상과 디자인을 조금 바꾸어 새로운 스타일의 개성 넘치는 청바지라고 광고를 하며 판다. 그것도 비싸게 말이다. 자본은 이런 식으로 어제까지 개성 넘치던 상품을 하루아침에 촌스러운 상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곤 ‘새로운 유행에 맞춘 개성을 표현하라!’고 강변한다. 그렇게 우리는 또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개성 넘치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별반 다를 것 없는 청바지와 티셔츠, 신발, 악세사리를 계속 사다 모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남들보다 빨리 유행하는 청바지·티셔츠·신발을 구입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과 구별 짓기를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기는커녕 졸지에 촌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사실 엄밀히 말해 자본이 요구하는 개성은 개성이 아니다. 자신의 개성을 표현한다는 명목아래 샀던 옷이나 신발, 악세사리는 이미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이 갖고 있을 테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구별 짓기를 강요하는 개성은 앞서 언급한 ‘흉내 내기’와 본질적으로 같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구별 짓기는 ‘초단타’ 흉내 내기일 뿐이다.


 지금 유행을 제일 먼저 ‘흉내 내기’ 위해 상품을 소비해서 잠시 ‘구별 짓기’에 성공하는 것, 그것을 개성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 ‘흉내 내기’를 하면 재빨리 또 다른 상품을 사서 새로운 흉내 내기를 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지금 시대의 개성 넘치는 패셔니스트들의 자화상이다. 서글프게도 우리는 구별 짓고 주목받기 위해 자본이 만들어 놓은 소비의 사이클에서 쳇바퀴 돌 듯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쳇바퀴를 도는 사이에 우리 주머니가 털리고 있는 게다. 생각해보면 참 서글프고 또 어리석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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