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자연의 일부다.
스피노자의 ‘감정’
"감정은 부정적인 것인가요? 그래서 통제하고 억압해야 하는 것일까요?" 스피노자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줄까? 먼저 스피노자가 ‘감정’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부터 살펴보자.
“감정이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며,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에티카, 제 3부, 정의 3)
스피노자는 감정이란 “신체의 변용(변화)”이자 동시에 “변용(변화)의 관념(의식)”이라고 말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예로 들어보자. 가슴(신체)이 두근거리고(변용) 동시에 그 두근거림(변용)을 의식(관념)하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사랑에 빠지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신이 그 사람 때문에 두근거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적확한 정의다. 어떤 감정이든, 감정은 신체적 변화와 동시에 그 변화의 의식을 나타낸다. 이는 뒤집어 말해, 신체적 변화와 그 변화의 의식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감정이 아니다.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고, 두근거리게 하는 대상을 의식할 수 없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감정에 대해서 덧붙인다. 감정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도 있고, 촉진하거나 억제할 수도 있다. 감정은 “신체의 변용”과 그 “변용의 관념”이다. 그런데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이냐에 따라, 신체의 활동능력이 증대되거나 감소되는 방향으로 신체의 변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희망’과 ‘절망’이라는 감정을 예로 들어보자. 희망이라는 감정이 찾아들 때 우리는 어떤가? 활기차고 의욕적이 된다. 즉, 희망은 우리의 신체활동능력을 증대·촉진시키는 신체적 변화를 만든다. 반면 절망은 우리를 위축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우리의 신체활동능력이 감소·억제시키는 신체적 변화를 만든다.
감정은 ‘신체-정신’적인 것
스피노자의 감정은 ‘신체-정신’적이다. 감정은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 “변용의 관념”이니까. 그리고 다양한 감정의 결에 따라, 그 신체의 활동능력이 증대되는 혹은 감소되는 “신체의 변용”과 “변용의 관념”이 발생하게 된다. 여기서 감정에 대한 해묵은 오해 하나를 풀 수 있다. 우리는 감정이 오직 정신적인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왜 안 그럴까? 감정은 느끼는 것이고 그것은 이것은 관념적인 것이니까.
하지만 이는 틀렸다. 감정은 관념이지만, 여느 관념과는 다르다. ‘이것은 저것보다 크다’라는 관념과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관념은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전자는 이성적 관념이고 후자는 감정적 관념이다. 그렇다면 이 두 관념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성적 관념은 “신체의 변용”과 그 “변용의 관념”이 없고, 감정적 관념은 그것이 있다. 이성적 관념이 오직 ‘정신’적이라면, 감성적 관념은 ‘신체-정신’적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감정에 대한 많은 오해와 혼란을 해소할 수 있다.
사랑, 미움, 연민 등등의 감정에 대해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정말 사랑하는 것인지, 미워하는 것인지, 안쓰러워하는 것인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이때 스피노자의 감정에 대한 정의를 떠올리면 모든 것이 명징해진다. 사랑, 미움, 연민을 정신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두근거리는지, 손을 떨리는지, 눈물이 나는지를 보면 된다. 그 신체적 변용에 집중하면 된다. 그것이 우리의 감정을 명료하게 알려준다. 감정은 ‘신체-정신’적이니까. 그렇다면 이제 궁금하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많은 감정들을 어떻게 정의했을까?
스피노자의 세 가지 감정
“나는 이 세 가지 감정(기쁨, 슬픔, 욕망)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기본적인 감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1, 주석)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은 세 가지 뿐이라고 말한다. 기쁨, 슬픔, 욕망. 의아하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정말 기쁘고, 슬프고, 욕망하는 것뿐일까? 우리는 그보다 더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스피노자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스피노자는 기쁨, 슬픔, 욕망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이라고 정의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달리 말해,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은 이 근본적인 세 가지 감정에 포함된다는 의미다. 스피노자는 이 근본적 세 가지 감정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욕망이라는 명칭을 인간의 모든 노력, 욕구, 충동, 의욕으로 이해한다. (중략) 기쁨이란 인간이 보다 작은 완전성에서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슬픔이란 인간이 보다 큰 완전성에서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욕망은 무엇인가를 원하는 마음이다. 그 ‘욕망’은 신체적 ‘욕구’와 ‘충동’에 의해서 발생되고,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노력’하게 된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욕망을 인간의 모든 노력, 욕구, 충동, 의욕으로 이해한” 이유다. 기쁨은 더 큰 완전성으로, 슬픔은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완전성’이란 인간이 더 활력적이 된다는 의미다. 즉, 기쁨을 느낀 인간은 더 활력적이 되고, 슬픔을 느낀 인간은 덜 활력적인 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명예욕·탐욕·욕정·경쟁심·대담함·자비심과 같은 감정은 모두 욕망에 속한다. 이는 모두 “인간의 모든 노력, 욕구, 충동, 의욕” 즉 욕망에 관계 되어 있다. 명예, 돈, 섹스에 대한 욕망, 용감해지고 약자를 돕고자 하는 욕망. 사랑·명예·호의·환희·희망·신뢰와 같은 감정은 모두 기쁨에 속한다. 이런 기쁨의 감정들은 모두 우리를 활력 넘치게 한다. 미움·멸시·공포·질투·수치·절망과 같은 감정은 모두 슬픔에 속한다. 이런 슬픔의 감정은 우리의 활력을 줄어들게 한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인간이 느끼는 48가지의 개별적인 감정을 정의하고, 이를 기쁨, 슬픔, 욕망이란 세 가지 근본적인 감정으로 구분했다.
감정은 자연의 일부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감정은 부정적인 것이기에, 통제하고 억눌려야 하는 것일까? 스피노자는 감정이라는 것 자체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자연 안에서는 자연의 결함 탓으로 여길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은 항상 한결 같으며, 자연의 힘과 활동능력은 어디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사물이든 그것의 본성을 인식하는 방법도 역시 동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그러므로 증오, 분노, 질투 등의 감정도, 그 자체로 고찰한다면, 다른 개개의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필연성과 힘에서 생겨난다.” (에티카, 제 3부, 서론)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이다. 그래서 “자연 안에서는 자연의 결함 탓으로 여길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신(자연)은 항상 한결 같으며, 신(자연)의 힘과 활동능력은 어디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신(자연)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가뭄, 태풍, 홍수, 폭설은 자연의 결함 탓이 아니다. 그것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다. ‘자연’스러운 일일뿐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관점으로 자연으로 해석하려 할 때만 그것이 자연의 결함 탓처럼 보일 뿐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역시 옳고 그른 것이 없다. 그저 모두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감정 역시 작은 ‘자연’의 일부다. 그러니 “증오, 분노, 질투 증의 감정도, 그 자체로 고찰한다면,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필연성과 힘에서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감정에 딱지를 붙여 옳고, 그름 예단하려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관점으로 ‘작은 자연’을 해석하려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가뭄·태풍·폭설이 잘못된 것(자연의 결함 탓)이 아니듯, 증오·분노·질투 역시 잘못된 것(인간의 결함 탓)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그저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감정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러니 만약, “감정은 부정적인 것이기에 통제하고 억눌려야 하는 것일까요?”라고 스피노자에게 묻는다면 되돌아 올 답은 분명하다.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여, 그것을 통제하고 억누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감정을 긍정하고 표현하는 삶.
감정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의 감정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욕망이든 어느 것 하나 부정적인 것이 없다. 수많은 감정들, 명예욕·탐욕·욕정·경쟁심·대담함·자비심·사랑·명예·호의·환희·희망·신뢰·미움·멸시·공포·질투·수치·절망. 그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은 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니까.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감정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데서 오지 않는다. 긴 시간 그 감정들을 억눌렸을 때 찾아온다. 자연을 억누르고 통제하려는 모든 시도가 더 큰 불행으로 다가오듯, 인간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감정이든, 감정은 누른다고 눌러지는 것이 아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욕망이든, 억압된 감정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더 크게 터져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사랑하는, 증오하는, 섹스하고 싶은 감정이 눌러지던가? 잠시는 누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감정은 누르면 누를수록 예상치 않은 곳에서 더 크게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억눌렀기에 돈에 대한 집착이 더 크게 터져 버린 사람이 한 둘인가. 끔찍한 범죄는 대체로 증오의 감정을 긴 시간 억압했던 결과다. 왜곡되고 뒤틀린 성적 욕망은 섹스하고 싶다는 감정을 강하게 억압했던 결과다.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은 ‘감정은 부정적이기에 억누르고 통제해야 한다’는 어리석은 믿음이다.
“사랑해!” “싫어!” “섹스하고 싶어!” 감정을 긍정해야 한다. 감정은 과도하게 억압되기 전에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유쾌하게 한다. “사랑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긍정하고 표현할 때, 돈보다 소중한 것이 많다는 삶의 진실이 드러난다. “싫어요!” 한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을 긍정하고 표현할 때, 그 미워하는 사람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틈이 열린다. “섹스하고 싶어!” 욕정이라는 감정을 긍정하고 표현할 때, 섹스가 욕구의 해소가 아니라, 대화이고 교감이라는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감정을 긍정하고 표현함으로써 풍요롭고 유쾌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