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욕이란 술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나 사랑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나는 술을 좋아한다. 좋은 영화를 볼때 좋은 술과 안주가 있으면 기분이 좋다. 좋은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좋은 술과 안주가 있으면 좋다. 다양하고 맛있는 술을 마실때 입과 코에 느껴지는 맛이 좋다. 다양하고 맛있는 술을 많이 마셔보고 싶다. 물론 이건 스피노자가 말한 음주욕은 아니다. 스피노자의 음주욕은 술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니까. 예전에 한동안 음주욕이라고 부를만한 욕망에 빠진적이 있었다. 그냥 사는게 좆같고 모든게 짜증나고 하는 기분이 마음에 크게 자리잡고 있을 시기였다. 그때는 자주 술을 마셨다. 한번에 많이 마신건 아니고, 자주 마셨다. 저녁을 먹다가 괜히 소주나 막걸리를 시켜서 먹고, 저녁에 자기 전에 맥주를 몇 캔 마시고 그랬다.
술을 마시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라 좆같은 기분을 잊고 싶어서였다. 술을 마시면 약간 알딸딸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방금 전까지 내 기분을 좆가게 만들었던 것들이 별거 아닌거처럼 느껴진다. 내가 다 이겨낼수 있고 강해진거 같은 기분이 든다. 술에 취하면 졸가 강해진 기분이 든다. 그 기분 때문에 술을 자주 마셨다. 현실을 잊고 싶어서. 혼자 술을 자주 마시고 취하면 항상 과거 생각을 많이 했던거 같다. 나의 찬란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이런 자위를 했었다. 무기력함과 패배의식을 잊기 위해서 그 당시에는 술을 참 자주 마셨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더이상 술을 그렇게 마시지는 않게 되었다. 운동을 시작한거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계기로 그 무기력함과 패배의식을 뚫고 나와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술 이야기를 하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그 시절 자주 가던 기사 식당이 있었다. 집 주변에 있는, 돼지불백을 맛있게 하는 유명한 식당이었다. 그날도 저녁을 먹기 위해 돼지불백을 시켰다. 그리고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막걸리를 시켰다. 혼자 두병을 마셨던거 같다. 아마 그날 졸라 좆같은 일이 있어서 그랬던거 같다.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술을 먹고 취한 상태에서 그날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우스웠다. 생각해보니 별거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고민을 했을까, 뭔가 일이 더 명확하게 보이고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술이 깨면 원상태로 돌아가겠지만. 아무튼 그 순간 문득, 예전에 이런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저것 철학을 공부했을때, 철학에서 배운 개념들 덕분에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을 좀 더 명확하게 바라보고 이해하게 되었던 기분. 그게 생각이 났다. 누군가 나에게 철학 배워서 뭐가 도움이 되냐고 묻는다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했을때처럼 용기를 낼수 있게 된다고 말할거 같다. 술보다 철학.
최근 몇주간 몸 상태가 안좋아서 술을 마셔도 그렇게 기분이 좋지가 않다. 역시 술을 맛있게 마시려면 체력이 있어야한다. 술을 마시기 위해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
필진 소개
강성찬 감독
- 철학흥신소 수석 요원.
- IBM을 그만두고 퇴직금 탈탈 털어 세계일주를 다녀왔음.
- 그래서 요즘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생계형 지식근로자가 되었음.
- 저서, '방황해도 괜찮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안 괜찮음)
- 텍스트보다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작가.
- 잠재력은 무궁무진한데, 계속 잠재해 있을 것 같음
- 사랑할 준비를 하고 있음(이라고 쓰고 여자친구 찾고 있음이라고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