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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에서 벗어나는 법

중독은 감정이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간명하다. 기쁨을 주는 대상을 향한 사랑과 욕망이 과도해지는 것을 막으면 된다. 중독은 기쁨을 쫓다 슬픔에 빠져버리는 상태 아닌가. 그러니 기쁨이 슬픔으로 변질되지 않을 만큼만 그 대상을 사랑하고 욕망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인간은 기쁨을 무작정, 무제한으로 쫒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사랑과 욕망이 과도해져서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인간의 보편적 감정의 파악     


먼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의 정의를 섬세하게 파악해야 한다. ‘사랑’과 ‘명예’를 예로 들어보자. 이 두 가지 감정은 기쁨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랑’은 과도하게 추구해도 슬픔으로 전환되지 않는 기쁨이지만, ‘명예’는 과도해지면 슬픔으로 전환되는 기쁨이다. 이 두 가지 감정의 정의를 섬세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과 ‘명예’ 모두를 과도하게 추구하게 된다. 이때 사랑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명예는 문제가 된다. 기쁨을 얻으려 명예를 과도하게 쫒다가 슬픔을 주는 야심 빠져버리게 된다. ‘야심’이라는 중독은 그렇게 탄생한다. 스피노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이 의도하는 바인 감정의 힘그리고 감정에 대한 정신의 능력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감정에 대한 일반적 정의만으로 충분하다감정을 제어하고 억압하는 정신의 능력이 어떤 성질이며 얼마나 큰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정신의 공통된 특질들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에티카제 3정리 56, 주석) 

    

 스피노자는 중독된 감정(탐식, 음주욕, 색욕, 탐욕, 야심)을 제어하는 정신의 능력을 크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다양한 각각의 감정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보편적 감정의 정의를 섬세하게 파악하는 사람은 그만큼 중독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사랑은 과도하게 쫒지만, 명예는 과도하게 쫒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또한 반대로 감정의 정의를 섬세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무엇인가에 너무 쉽게 중독될 수 있다. 기쁨을 주는 다양한 감정들을 무작정, 무제한으로 쫓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보편적인 감정의 정의를 잘 파악한다고 해서 중독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사람마다 기쁨이 슬픔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탐식의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은 밥 한 그릇에서 포만감(기쁨)을 느끼고 그보다 많이 먹게 되면 불쾌감(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이는 세 그릇 정도는 먹어야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즉 사람마다 기쁨의 대상이 중독의 대상으로 변화되는 지점이 다르다.


     

‘나’의 단독적인 감정의 파악       


두 번째 방법이 필요하다. 보편적 감정의 정의만큼이나 단독적인(개별적인) 감정도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마다 기쁨이 슬픔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감정은 ‘신체적-정신적’이다. 그러니 단독적인 감정을 섬세하게 잘 파악한다는 것은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를 섬세하게 살핀다는 것을 말한다. 게임은 즐거움(기쁨)을 준다. 하지만 게임을 오래 하다보면 머리가 띵하고 눈이 아픈 불편함(슬픔)을 느낄 때가 있다. 게임 중독은 기쁨이 슬픔으로 전환되는 지점을 파악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이제 중독에 관한 오해를 하나 풀 수 있다. 중독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게임·도박·쇼핑 중독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게임, 도박, 쇼핑을 완전히 끊는 게 아니다. 그것들을 끊게 하려고 할 때 중독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조르주 바타유가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금기의 대상은 금지되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강력한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에로티즘의 역사)  금지는 더욱 욕망하게 해서 중독을 강화할 뿐이다. 놀랍게도, 게임, 도박, 쇼핑을 하는 것이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알콜 중독으로부터 벗어났다. 하지만 술을 마신다. 아니 술을 마시기에 알콜 중독으로부터 벗어났다. 나는 이제 안다. 술이 어디까지 기쁨을 주고 어디서부터 슬픔을 주는지. 그래서 기쁨을 줄 때까지 술을 마실 수 있다. 술을 자유롭게 마시게 되었을 때 알콜 중독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쁨이 슬픔으로 전환되기 전까지 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중독은 감정의 일부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첫째, 인간이 가진 보편적 감정의 정의를 잘 파악할 것. 기쁨이 과도해져서 슬픔이 되는 감정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둘째, ‘나’(단독적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살필 것. ‘나’의 정신과 신체에서 기쁨이 슬픔으로 전환되는 지점을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달리 말해,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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