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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함을 극복하는 법

스피노자의 '소심', '당황', '대담함'

스피노자의 ‘소심’ 


먼저, 스피노자가 소심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부터 알아보자.      


인간으로서 원하지 않거나 바라지 않는 것을 원하도록 하는 감정을 소심이라고 한다그러므로 소심은 인간으로 하여금자기가 미래의 해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더 작은 해악으로 피하게 하는 한에 있어서의 공포일뿐이다. (에티카제 3정리39, 주석    

 

 스피노자에 따르면, ‘소심’은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게 되는, 혹은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되는 감정이다. 전쟁에 참전한 병사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살고 싶고 죽고 싶지 않다. 즉 그가 원하는 것은 삶이고, 원하지 않는 것은 죽음이다. 하지만 그 병사는 자살해버렸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죽음)을 원하게 되는, ‘자신이 원하는 것’(삶)을 원하지 않게 되는 감정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 병사의 내면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자.       


 스피노자는 소심함을 ‘공포’라고 정의한다. 어떤 공포일까? “미래의 해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더 작은 해악으로 피하게 하는” 공포다. 이제 그 병사의 내면 상태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병사는 지금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살기 가득한 눈빛의 적들 앞에 서 있다. 그는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하지만 적들이 점차 다가오자 총부리를 자신의 목젖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 병사는 소심하다.

      

소심함, 큰 공포를 작은 공포로 피하고 싶은 마음.


다가오는 광기 어린 적들은 ‘미래의 해악’이다. 그 병사에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해악’(죽음)은 너무나 큰 공포다. 그 공포를 감당하지 못해 ‘더 작은 해악’(자살)으로 피해버린 것이다. 이는 ‘더 작은 해악’(자살)으로 ‘미래의 해악’(죽음)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적들이 다가오는 그 공포를 견디지 못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되었고,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게 되었다. 그는 소심하다. 그래서 자살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비단 참혹한 전장의 소심한 병사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모에게 혼날까봐 가출해버리는 학생. 상사에게 욕을 먹을까봐 스스로를 욕하는 직장인. 이들은 모두 소심하다. 이들의 정서적 상태는 공포에 질려 자살해버린 병사와 정확히 같다. ‘미래의 악’(부모에게 혼남, 상사의 비난)의 공포를 감당하지 못해, ‘더 작은 악’(가출, 자기비난)으로 도망치는 것이니까. 그들은 소심해서 ‘원하지 않는 것’(가출, 자기비난)을 원하고, ‘원하는 것’(귀가, 자기긍정)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 왜 아무 말도 못했을까?”라고 자책하게 되는 우리들의 갖가지 소심함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소심함은 ‘미래의 해악’의 공포를 감당하지 못해 ‘더 작은 해악’으로 피하고 싶어서 발생하는 사달이다. 소심한 이들이 직장 상사에게, 음식점 주인에게, 염치없는 인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가는 갖가지 ‘미래의 해악’이 다가올 것 같아서다. 그 공포를 감당하지 못해, 늘 ‘더 작은 해악’(침묵, 억울함, 답답함)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원하지 않게 되고, 원치 않는 것을 원하게 된다. 이 얼마나 소심한가.

      


소심함의 원인, 당황   

  

공포 때문에, ‘미래의 해악’을 ‘더 작은 해악’으로 피하려는 것이 소심함이다. 이는 소심함의 현상이지, 소심함의 원인이 아니다. 현상보다 원인이 중요하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정작 중요한 건 현상이 아니라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심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만일 미래의 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악에 대한 공포에 의해 방해받아 그가 스스로 무엇을 택해야 할지 모른다면그 경우의 공포는 당황(consternatio)으로 불리는데특히 그가 두려워하는 두 해악이 극심할 경우 그러하다. (에티카제 3정리39, 주석     


 스피노자는 소심함의 원인을 ‘당황’이라고 말한다. ‘미래의 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악’에 의해 방해 받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는 공포의 상태가 ‘당황’이다. 밤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칼을 들이 밀었다고 해보자. ‘당황’스럽다. 왜 당황스러울까? ‘미래의 악’(죽을 수도 있다)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악’(칼)에 의해 방해 받아 무엇을 택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큰 해악과 작은 해악의 공포에 사로 잡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 된 감정이 당황이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당황’이다.  

   

당황이 공황이 될 때.


직장인 시절, ‘당황’을 절절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미래의 해악’과 ‘다른 해악’의 공포에 사로잡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미래의 해악’은 가난한 노년, 무능력한 가장이었고, ‘다른 해악’은 매일 아침 눈 뜨기도 싫을 정도의 직장의 고통이었다. 이 두 해악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다. 가난한 노년, 무능력한 가장이 되는 것도 극심한 공포였고, 직장을 다니는 것도 극심한 공포였다. 그 공포에 짓눌려 직장을 그만둘 수도, 다닐 수도 없었다.      


 극심한 공포를 주는 두 해악 사이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래서 긴 시간 당황했다. ‘당황’이 긴 시간 지속될 때 ‘공황’이 된다. 그때 나는 이유 없이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이 가빠지기도 하고 근거 없는 두려움에 휩싸이곤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건 전형적인 공황장애 증상이었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consternatio’(깜짝 놀람, 경악, 혼란)가 ‘당황’뿐만 아니라 ‘공황’으로 번역되곤 하는 이유일 테다. 이것이 직장을 다닐 때 내가 매사에 한 없이 소심했던 이유였다. 당황해서 소심해졌다.     



소심함을 극복하는 법 

    

어떻게 소심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간단하다. 당황하지 않으면 된다. 당황해서 소심해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럼 어떻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미래의 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악’에 의해 방해 받아 공포에 빠진 상태가 ‘당황’이다. 그러니 당황하지 않을 수 있는 논리적 방법은 명쾌하다. ‘미래의 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악’에 의해 방해 받지 않으면 된다. 달리 말해, ‘미래의 악’에 당당하게 맞서면 된다.     

 

 사고를 친 학생의 ‘미래의 악’은 무엇인가? 부모에게 혼나는 것이다. 불안한 직장인의 ‘미래의 악’은 무엇인가? 상사의 비난이다. 다가오는 적 앞에 서 있는 병사의 ‘미래의 악’은 무엇인가? 다갈 올지도 모르는 죽음이다. 그 모든 미래의 악에 맞서면 된다. 그럴 수 있다면 더 이상 당황하지 않는다. 그때 더 이상 소심해지지 않는다. 부모에게 혼나는 것이 두려워 가출하고, 상사의 비난이 두려워 스스로를 비난하고, 다가올 죽음이 두려워 자살을 해버리는 소심함은 없다.    

  

대담함은 동료가 맞서기를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에티카제 3감정의 정의) 

   

 소심하지 않는 이들은 대담하다. 스피노자는 그 ‘대담함’을 동료가 맞서기를 두려워하는 위험을 맞서는 욕망이라고 했다. 그 이유를 알겠다. 우리 주변의 동료들은 언제나 ‘미래의 악’을 두려워하는 이들 아니던가. 아직 다가오지 않았기에,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을 무던히 두려워하는 사람들 아니던가. 그 공포에 사로잡혀 더 작은 악으로 도망쳐버리는 이들 아닌가. 우리의 동료들은 소심한 이들이다. 대담한 이들은 소심한 동료들이 두려워하는 ‘미래의 악’에 당당히 맞서는 사람이다. 



대담함은 미래의 악에 맞서는 것

     

나는 소심함에서 조금 멀어졌고, 담대함에 조금 가까워졌다. 당황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미래의 악’(가난한 노년, 무능력한 가장)에 당당하게 맞서려고 애를 썼다. ‘당당하게 맞선다’는 말은 자신감이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가난한 노년, 무능력한 가장’은 결코 되지 않겠다는 자신감이나 또는 그렇게 되어버리겠다는 포기가 아니다. ‘당당하게 맞선다’는 말의 진의는 겸허함이다. ‘미래의 악’을 피하려고 노력하겠지만 그 ‘미래의 악’이 다가온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겸허한 마음. 

     

 그 겸허한 마음 덕분에 직장을 그만둘 수 있었다. 가난한 노년, 무능력한 가장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래의 악’이 찾아온다면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래서 당황하지 않게 되었다. 공황도 사라졌다. 그래서 예전만큼 소심하지 않다. 그제 서야 모든 삶의 진실이 선명하게 보였다. 가난한 노년, 무능력한 가장이라는 ‘미래의 악’이 내게 찾아올지 아닐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것이고, 직장을 다닌다고 해서 그 ‘미래의 악’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나는 더 이상 ‘미래의 악’의 공포에 휩싸여 ‘더 작은 악’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그런 소심함은 이제 내게 없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갈 수 있다. 그 정도의 담대함은 내게도 있다. 그 담대함만큼 내 삶은 유쾌해졌고, 건강해졌다. 우울하고 침잠된 삶에서 벗어나 유쾌하고 건강한 삶을 원한다면, 각자의 ‘미래의 악’에 집중해야 한다. 소심함은 당황에서 오고, 당황은 미래의 악에 당당하게 맞설 수 없을 때 오니까. 잊지 말자. 소심함은 없다. ‘미래의 악’에 담대하게 맞설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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