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경탄'
조롱의 기쁨을 마음껏 누려도 될까?
뒷담화는 기쁨을 준다. 조롱하는 뒷담화는 더욱 그렇다. 경멸의 대상이 증오의 대상 안에 있다고 상상하기에 기쁘다. 경멸의 대상을 상상 속에서 마음껏 파괴하고 없애버릴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기쁨을 마음껏 누려도 될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쁨에는 두 가지 기쁨이 있다. 마음껏 추구해도 계속 기쁨인 기쁨과 마음껏 추구하면 어느 순간에 슬픔이 되는 기쁨. 조롱이라는 기쁨은 후자다.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우리들이 증오하는 이가 파멸되거나 다른 악을 입는 것을 우리들이 표상하는 것에서 생기는 기쁨은 어떤 슬픈 감정을 동반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47)
직장 상사를 증오한다고 해보자. 그가 파멸되거나 다른 악을 입는 것을 상상할 때 기쁘다. 하지만 그때 묘한 슬픔도 있다. 그건 우리의 내면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증오해본 사람은 안다. 그 증오의 대상을 쉽게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를 죽일 만큼 증오하면 그를 죽여 버리면 온통 기쁨을 느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증오의 대상이 죽으면, 즉 사라지면 그에게 해악을 가하면서 느낄 나의 기쁨 역시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직장 상사를 증오하더라도 그가 파멸되거나 다른 악을 입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분명 기쁨을 준다. 하지만 동시에 기묘한 슬픔도 있다. 내가 누릴 기쁨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슬픔. 조롱하는 뒷담화 역시 마찬가지다. 조롱과 뒷담화는 기쁨을 주지만 그 기쁨을 누리다 보면 어느 순간 슬픔에 빠지게 된다. 스피노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쁨이 더 큰 슬픔이 되는 조롱
“한 사람이 (누군가를) 조롱한다는 것은 증오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쁨은 지속성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팀장, 그 새끼를 여자 친구보다 좋아하는 것 같아” 눈만 뜨면 팀장 뒷담화를 했던 동료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했던 말이다. 그는 팀장을 경멸했다. 그래서 조롱했다. 기쁨을 누렸다. 그 기쁨에 취해 시도 때도 없이 팀장 뒷담화를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사랑하는 그래서 기쁨을 주는 여자 친구 생각보다 증오하는 그래서 슬픔을 주는 팀장 생각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을. 정말 그랬다. 그는 하루 종일 온통 팀장 생각만 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조롱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해야 했으니까.
조롱은 기쁨이지만 지속성이 없다. 더 나아가 조롱의 기쁨은 어느 순간 슬픔으로 되돌아온다. “조롱한다는 것은 증오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롱(기쁨)을 느끼려면 반드시 증오(슬픔)하는 대상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그래서 과도하게 한 사람을 조롱하면 증오의 대상을 떠올리느라 슬픔의 나락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팀장을 조롱하느라, 정작 여자 친구 생각을 못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찌 해야 할까?
뒷담화를 멈추는 방법
조롱의 뒷담화는 잠시의 기쁨 뒤에 더 큰 슬픔을 준다. 하지만 쉽사리 멈출 수 없다. 어찌 해야 할까? 조롱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해보자. 조롱은 경멸의 감정에서 시작된다. 경멸의 대상이 나타났을 때 조롱하고 싶은 욕구가 나타난다. 즉, 조롱을 멈추고 싶다면 경멸의 감정을 멈추면 된다. 경멸이 사라졌을 때 조롱 역시 사라지게 된다. 이제 하나의 질문만 남는다. 어떻게 경멸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은 그것과 반대되는, 그리고 억제되어야 할 그 감정보다 더 강력한 어떤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면, 억제될 수도 없고, 제거될 수도 없다. (에티카, 제 4부, 정리 7)
스피노자는 감정은 그 자체로 억제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반대되는 다른 감정에 의해서 억제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 사랑과 증오를 생각해보면 된다. 예컨대, 누군가를 증오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억제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증오의 반대 감정인, 사랑에 의해서만 억제되거나 제거된다. 미워하는 마음은 그 미워하는 마음만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던가. 그렇다면 ‘경멸’의 반대되는 감정은 무엇일까? ‘경탄’(놀라움)이다.
경탄(놀라움)이란 어떤 사물에 관한 표상이다. 이 특수한 표상은 다른 표상과는 아무런 연결이 없기 때문에 정신은 그 표상 안에 확고히 머무른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우리는 언제 경탄(놀라움)에 빠질까? 나는 처음 바다를 보았을 때, 첫 사랑을 만났을 때 경탄에 빠졌다. 어떤 사물(바다, 그녀)을 만났고, 그에 관한 표상(이미지)가 생겼다. 그런데 그 이미지는 이전에 다른 이미지와 아무런 연결이 없는 이미지였다. 그래서 그 이미지는 내 마음에 확고히 머무르게 되었다. 바다와 첫사랑을 처음 만났을 때 경탄(놀라움)에 빠졌다. 경탄은 경멸과 반대된다. 원이 하나 있다고 해보자. 경멸(돈벌레)은 원 밖(음악, 소설)에 시선을 두는 것이고, 경탄(첫사랑)은 원 안(하얀 피부, 긴 머리)에서 시선을 두는 것이다.
경탄의 대상을 찾아 나서기
경멸은 경탄으로 억제되거나 사라진다. 우리는 어떻게 경멸의 대상으로부터 눈을 뗄 수 있을까? “그를 경멸하지 말아야 하지!”라고 다짐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오직 경탄의 대상을 찾았을 때만 경멸의 대상으로부터 눈을 떼게 된다. 세상에는 우리를 놀라게 할 많은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찾았을 때, 경멸은 억제되거나 사라진다. 경멸이 사라지면 누군가를 조롱하는 뒷담화를 할 일은 애초에 없다. 조롱은 경멸로부터 시작되니까.
이제 왜 냉소적인 사람들이 더 자주 조롱을 일삼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냉소적인 이들은 어떤 것에도 크게 감동받지 않기 때문이다. 냉소적인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놀라운 대상들 앞에서도 경탄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자주 경멸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더 자주 조롱하는 뒷담화에 휩쓸린다. 조롱을 일삼는 냉소적인 이들은 어리석다. 작은 기쁨을 누리려다 큰 슬픔에 빠져버리는 까닭이다.
조롱의 뒷담화를 멈추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경탄의 대상을 찾으면 된다. 음악, 미술, 소설, 영화, 책, 사람, 사랑, 수업, 여행 등등 우리를 크게 감동시킬 만한 것들을 많다. 그것을 하나씩 찾아가면 된다. 큰 감동을 받아 터져 나오는 웃음과 눈물. 그 경탄의 웃음과 눈물이 경멸의 대상을 사라지게 한다. 왜 안 그럴까?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영화와 음악, 놀라 입이 벌어질 여행과 사람과 마주할 때, 돈벌레나 꼰대 같은 경멸의 대상은 이미 나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조롱과 뒷담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