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환상이 남긴 슬픔, 후회
후회는 ‘정신의 자유로운 결심에 의하여 행하였다고 믿는 어떤 행위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의 자유로운 결심에 의하여 행하였다고 믿는”에 있다. 정신의 자유로운 결심이 정말 가능할까? 그것이 온전히 가능하다면 그건 신의 전지전능함일 테다. 인간은 온전히 자유롭게 무엇인가를 결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언제나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상황과 조건에 처해 있기 마련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어떤 부모를 만나고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을 후회하기도 하고 자랑하기도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부모는 나쁘다고 불리는 행위를 비난하고, 그런 행위 때문에 자녀들을 자주 꾸짖음으로써, 또 반대로 올바르다고 불리는 행위를 권하고 칭찬함으로써, 슬픔의 감정이 전자와 기쁨의 감정이 후자와 결합하도록 만들었다. (중략) 각자는 교육받은 것에 따라 어떤 행위에 대해 후회하기도 하고 또 자랑하기도 한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27, 해명)
우리의 정신은 온전히 자유로운 결심을 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조건(부모, 교육)에 따라 어떤 행위에 대해 후회하기도 하고 또 자랑하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후회라는 감정의 놀라운 진실을 하나 알게 된다. 후회는 위축의 감정이 아니라 오만의 감정이다. 후회는 신과 같은 강한(혹은 과잉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후회가 무엇인가? 자신에게 처한 현재 상황의 원인을 모두 자신에게 돌릴 때 발생하는 감정 아닌가. 과도하게 후회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불행을 직접적으로 초래했다고 믿는다. 즉, 자신의 선택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믿는다. 그래서 과도하게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후회를 다루는 법
“후회가 밀려 들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제 답할 수 있다. 과잉된 자의식에서 벗어나면 후회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며 세상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타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때 보인다. 지금 내 삶이 슬픔에 빠진 것은 오롯이 나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 때문이 아니었음을. 지금 나의 슬픔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내몰린 결과였음을 깨닫게 된다. 후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후회는 내가 자유로웠던 만큼 하면 된다. 내가 자유롭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후회의 대상이 아니다.
직장인이었던 시절, 취업한 것을 지독히도 후회했다. “일찍 해외로 나갔어야 했어.” “좀 더 일찍 사업을 준비했어야 했어.” 당연했다. 직장은 내게 가장 큰 슬픔을 주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취업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취업을 당한 거였다. 취업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돈을 벌어서 생계를 유지해야 나가야 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아마 취업을 하게 될 테다. 아니 할 수밖에 없을 테다.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님을, 세상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조건과 상황이 엄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더 이상 과거의 내 선택들을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노파심에서 할 말이 있다. 과잉된 자의식을 벗어난다고 해서 지금의 불행한 현실이 사라진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후회’라는 감정을 잘 다룰 수 있다. 후회를 잘 다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슬픔이 닥쳐왔을 때, 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부분만 후회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과도한 후회는 언제나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때 발생하는 감정이니까. 그렇게 후회라는 감정을 잘 다룰 수 있게 되면 점차 불행이 걷힌다. 후회를 잘 다루는 이는 과거의 묶인 삶에서 벗어나 눈앞에 닥친 지금의 삶을 강건하게 살아낼 준비를 하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