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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C와 페미니즘

얼마 전 ‘UFC’(격투기의 메이저 리그라고 할 수 있다.) 시합이 있었다. ‘조지 마스비달’과 ‘벤 아스크렌’의 시합이었다.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시합이 시작한지 2초 만에 끝나버렸다. ‘마스비달’이 무릎 공격으로 ‘아스크렌’을 실신시켜버렸다. 시합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게 있었다. 시합이 있고난 후의 팬들의 반응이었다.      


“마스비달, 개매너네. 너도 담에 똑같이 당할 거다.” 
“마스비달, 개양아치네. 저런 식으로 조롱하다니. 나중에 배로 돌려받아라.”
“저 새끼(마스비달)는 선수자격 박탈됐으면 좋겠다. 인성 쓰레기 새끼네.”     



 시합이 끝난 후, 마스비달을 향한 팬들의 반응은 대부분 원색적인 비난과 욕설이었다. 팬들이 분노한 표면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니킥으로 이미 실신시킨 후에 두 번의 파운딩(누워있는 상대를 주먹으로 가격하는 것)을 했다는 것과 기절한 상대에게 '일어나'라고 조롱한 것. 의아했다. 격투기 팬이라면 그 두 가지 일은 크게 비난 받거나 욕먹을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안다.      


 격투기 선수는 심판이 말리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상대를 공격해야 한다. 축구 선수가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뛰는 것처럼. 마스비달은 그렇게 했다. (실제로 심판이 말린 후에는 마스비달은 단 한 차례도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승리 세리머니도 마찬가지다. 기절한 상대에게 일어나라 식의 세리머니보다 더 모욕적인 세리머니도 많았다. (기절한 상대를 묻어버리는 제스처의 세리머니도 있었다.) 그런데 왜 유독 마스비달에게 가혹한 비난이 쏟아졌던 걸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그 시합은 마치 '무방비'로 있는 상대를 '무자비'하게 공격한 것처럼 보였다는 데 있다. 실제로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는 ‘마스비달’이라는 선수의 이미지가 ‘싸움꾼’이라는 데 있다. 격투기 선수들의 이미지는 크게 나누면 둘 중 하나다. 운동선수와 싸움꾼. 마스비달은 후자의 이미지다. (실제로 스트리트 파이트를 즐겨했다.)      


 격투기 팬들은 대부분 남자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 중에 어린 시절에 부당한 폭력에 굴복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일진이건 찐따건 마찬가지다. 항상 더 강한 사람이 있으니까. 격투기 팬들(남자)이 마스비달을 과도하게 비난하는 이유는 피해의식 때문이다. 마스비달을 보며, ‘싸움꾼’인 녀석(친구, 선배, 깡패)이 ‘무방비’ 상태인 나를 ‘무자비’하게 때렸던 기억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떠올랐던 게다. 


 과거의 그 억울하고 두려웠던, 하지만 시간이 지나보니 분했던 기억이 되살아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마스비달에게 분노를 느꼈던 게다. 이 비합리성을 은폐하고자, 마스비달의 선수 자질, 인간성, 매너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어찌 이해할 수 없을까. 나 역시 그런 기억이 있으니까 말이다.


   

 ‘마비스달’을 향한 격투기 팬들(한국 남자들)의 비난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한국의 ‘페미니즘’이 떠올랐다. 여기서 말하는 ‘페미니즘’은 건강한 담론을 형성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다. 아버지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 사진을 불태우고, 자신이 받는 불이익은 전부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하여 어떤 이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적대시하는 일부 ‘페미니즘’이다. (이런 태도를 ‘페미니즘’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지 모르겠어서  편의상 그렇게 하자.)   

  

 그런 유사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이들은 어떤 남자들을 너무 쉽게 비난하고 욕한다. 그 비난과 욕은 그 남자를 향한 것이 아니다. 과거 자신에게 부조리하고 부당한 폭력을 행사한 이들의 대리물일 뿐이다. 그 비합리성을 은폐하고자, 여성 인권, 페미니즘적 가치를 등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유사 ‘페미니즘’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한국 사회의 여자 중에서 부당하고 부조리한 남성적 폭력에 굴복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말이다. 한국 사회는 오래전부터 그런 괴물 같은 사회였다. 여자로 살아왔다는 것에서 피해의식이 없을 수 없다. 피해의식은 피해를 받아서 생기는 의식이니까. 불행한 시간을 지나 온 이들에게 합리성과 논리성을 요구하는 것은 야만이다. 죽고 죽여야 하는 전장을 지난 온 이들의 비합리와 비논리를 따져 묻는 것보다 야만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네들의 비합리와 비논리를 껴안은 것은 전장을 겪지 않은 이들의 최소한 염치다.      


 이글은 격투기 팬들(남자들을)을 위한 글이다. ‘마스비달’에게 비합리와 비논리의 원색적인 비난과 욕설을 퍼부을 수밖에 없다. 남자들에게는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있는 까닭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여자들에게도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 시대에 유사 ‘페미니즘’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남자들의 '일상'이 여자들에게는 작은 '전장'이었음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 알게 될 테다. 유사 '페미니즘'을 따뜻하게 껴안는 것은 남자로 살아온 이들의 최소한의 염치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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