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할까?
돈이 목적인 일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가장 최선은 일의 목적이 즐거움이 되고, 그 즐거움의 부산물로서 돈을 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할 때는 그것에 흠뻑 빠져서 즐겁고 결과적으로 그 즐거움의 대가로 돈을 벌게 되는 그런 삶 말이다. 이런 삶이 없을 것 같지만 둘러보면 이런 최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글을 쓰면서 즐겁지만 그 즐거움으로 인해 나온 책으로 돈을 버는 작가, 그림을 그릴 때 흠뻑 빠져 그림을 그리지만 그 그림이 돈이 되는 화가 같은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결코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소중한 일을 충분히 즐기는 결과로 돈을 벌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일을 하는 이유가 즐거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의 부산물로 돈이 ‘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일의 결과물이 돈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네 일상에서 일이란 것은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것이니 일은 즐거워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나 역시 알고 있다. 그런 최선의 삶을 살아 내는 사람은 아주 소수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즐거움을 결과물로 하고, 그 부산물로 돈을 버는 그런 삶이 어디 쉬운가? 생각만 해도 행복한 삶이다. 하지만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행복이 그리 흔한 것이었다면 우리가 그것을 그리 갈망하지도 않았을 게다. 일을 할 때 즐거움이 목적이 되고, 돈이 부산물이 되는 그런 최상의 삶은 오랜 시간 꾸준히 준비해야 가능한 삶이다. 그런데 우리는 당장 오늘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아무 준비도, 노력도 없이 즐겁게 일하고 그 결과로 돈을 벌게 되는 그런 삶이 눈앞에 펼쳐질 리가 없다.
최상의 삶을 살 수는 있지만, 누구나 섣불리 최상의 삶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매달 생활비 쪼들리는 월급쟁이가 작가나 화가가 되겠다고 당장 내일 사표를 던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세상 누구도 삶에서 최선의 선택만을 하며 살수는 없다. 누구든 갖가지 현실적 문제들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언제까지 일하는 유일한 이유가 돈뿐인 생활을 계속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때로 삶에 차선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차선책은 무엇인가?
일의 결과물이 즐거움, 부산물이 돈인 경우는 흔치 않다. 요즘 같이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즐거움을 위해 일한다는 건, 배부른 사람들의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 먹고 살기 힘든 세상, 일의 결과물이 돈이면 어떤가? 세상이 그러니 어쩌랴? 하지만 나는 최소한의 바람이 있다. 적어도 일의 결과물도 부산물도 모조리 돈이 되는 삶만은 피했으면 좋겠다. 하루 최소한 8시간 이상을 해야 하는 일의 유일한 목적이 돈 뿐인 삶, 조금 처량하지 않을까? 인간은 밥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 않은가. 또 밥만으로 사는 인간은 어째 좀 서글프지 않은가?
차선책은 일의 결과물과 부산물을 바꾸는 것이다. 일의 결과물을 돈으로, 부산물을 즐거움으로 하는 것이다. 돈이라는 결과물을 위해 일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최소한 그 일의 부산물로서 약간의 즐거움조차 포기하지는 말자는 거다. 이 방법으로 조금 더 행복하게 일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대기업에 취업을 했다. 거기서 4년간 일했다. 그는 ‘그 4년이 지옥 같았다’고 말했다. 일을 하는 유일한 이유가 오직 뿐, 자신이 하는 일에 어떤 의미도 즐거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지금은 조그만 학원에서 강사로 일한다. 급여는 줄었지만 아이를 가르치는 보람과 즐거움이 있단다. 그 친구는 “조금 더 빨리 직장을 옮길걸 그랬어”라고 말하며 예전보다 지금 삶에 더 만족하고 있다. 그가 대기업을 떠나 학원으로 일터를 옮긴 건 분명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대기업에서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즐거움이라는 부산물을 얻고 있다. 나름 성공적인 차선책을 선택한 셈이다.
또 다른 차선책이 있다. 삶에서 ‘돈을 결과물로 하는 일’과 ‘즐거움을 결과물로 하는 일’을 양분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전자를 ‘일’이라고 하고, 후자를 ‘취미’라고 한다. 맞다. 취미라도 갖자는 말이다. 지금 직장에서 돈 이외에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면, 또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직장을 옮길 수 없다면, 순수하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취미라도 갖자는 거다. 그런데 이 차선책의 성패 여부는 취미를 대하는 태도에 달려있다. 삶의 활력소가 되고 즐거움이 되는 취미 하나 정도 없는 사람은 드물게다.
그런데 취미는 느끼는 즐거움을 기준으로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 우선은 ‘자유로운 취미’다. 이것은 어떤 구속력, 압박감이 없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취미다. 취미가 주는 자유로움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취미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골프, 영화감상이 취미지만, 그건 언제든 내 맘대로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취미에 매료된 경우가 있다. 하긴 돈을 버는 일에 구속당하고, 압박당하며 사는 사람이 이런 취미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들도 숨 쉴 구멍은 있어야 하니까.
나머지 경우는 ‘진지한 취미’다. 취미의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다. 직장을 다닐 때 내 취미는 철학이었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철학에 빠져 있을 때, 시간이 어찌 가는지도 몰랐다. 한 시간 걸리는 출근길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출근길 지하철이 내가 철학 책을 온전히 몰입해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철학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취미가 아니었다.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런 취미였다. 학창시절 당구에 빠진 친구가 “요즘 잘려고 누우면 천장이 당구 다이처럼 보여!”라는 말이 그제 서야 이해되었다.
어떤 취미든 없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자유로운 취미’만 즐긴다면 삶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이다. 괴롭게 그지없는 지금의 일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요원하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자유로운 취미’의 헛헛함을. 평일에는 자유로운 취미로 골프를 즐기는 사람은 골프 칠 생각으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를 버티지만, 또 주말이 지나가면 다시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시 구속과 속박으로 점철된 직장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하지만 ‘진지한 취미’를 즐기면 다른 가능성이 떠오를 수도 있다. 취미 그 자체를 즐기는 삶을 이어가다보면 뜻하지 않게 그 취미로 돈까지 벌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다. 10년이 훌쩍 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주짓수(유도와 비슷한 운동)라는 ‘진지한 취미’를 즐긴 사람은 알고 있다. 그에게 주짓수는 ‘자유로운 취미’가 아니었다. 즐거움을 주는 운동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일처럼 진지하게 대했다. 동시에 그는 결코 돈을 벌려고 주짓수를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주짓수에 몰입했기에 그는 지금 주짓수 체육관을 열고 관장님이 되었다. 주어진 일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삶의 반전 아닌가. 그는 ‘진지한 취미’인 주짓수로 돈마저 벌고 있다. 모두가 그리도 원하는 최상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즐거움을 결과물로 하는 일을 하면서 그 부산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바로 그 최상의 삶 말이다.
누군가는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직장에서 일하고 치킨 집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파김치가 되는데 어떻게 또 다른 일을 하란 말이오!?’라고 말이다. 맞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리 말했나보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보조국사 지눌의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옳다. 아픈 말일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삶의 진실이다. 야박한 말이지만, 삶은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고되지 않는 삶은 없고, 사연 없는 삶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걸음 내딛어야 하는 것이 삶이다.
직장은 언제나 바쁘다. 자유로운 취미든, 진지한 취미든 그것을 편하게 내버려둘 리가 없다. 삶에 변하를 꾀하고 싶다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삶은 언제나 선택의 문제고, 선택은 언제나 용기와 결단의 문제다. 일찍 퇴근할, 주말 특근을 거부할 용기와 결단이 없는 직장인은 ‘진지한 취미’라는 차선책을 선택할 수 없다. 또한 그날 매출이 조금 낮아질 것을 감당할 용기와 결단이 없는 치킨 집 사장은 언제나 돈이 목적인 일에 소모되며 하루를 버티듯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생은 언제나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내려놓아야 하는 정면 돌파다.
하지만 너무 좌절할 필요는 없다. 삶의 반전은 가능하다. 주짓수 관장처럼 작고 소박하지만 자신만의 삶의 반전을 이뤄낸 사람은 적지 않다. 그런 삶을 몇 알고 있다. 직장을 다니다가 오래 즐겼던 목공예 제작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작은 안경점을 운영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금융업에 종사하다 사회적인 활동을 하다가 언론사 대표가 된 사람도 있었다. 돈이 목적인 일로는 평범한 삶을 살기도 버겁지만, 즐거움이 목적인 일에는 상상하는 것 이상의 힘이 있다.
우리가 비범해질 수 있는 잠재력은 결국 우리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속에 있다. 이것은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이야기도, 세상을 과도하게 낙관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철학자 강신주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행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을 버리고, 주위의 평판이나 경제적 이득 때문에 노동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스스로 비범해질 수 있는 길을 버리고 평범한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누군가 우리에게 '왜 일을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즐거우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 흠뻑 빠져 즐겁게 일을 한 부산물로서 돈을 벌게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라고 최상의 삶을 살지 말란 법이 있나?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일을 즐기기 위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도 조금 더 밝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