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분명 있다, 놀이 속에.
“제기랄, 주말에 뭔 등산이야!”
속으로 외쳤다. 직장 생활을 할 때였다. 새로 부임한 팀장이 팀 단합차원에서 주말에 등산을 가자고 한 것이다. ‘이번 주는 주 7일 근무다’라고 생각하며 일요일 아침 팀원들은 관악산 입구에 모였다. 아니나 다를까 팀원들은 모두 똥 씹은 표정을 팀장 앞에서 숨기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체력이 좋지 않은 편도 아니었지만, 그 날 등산은 유독 힘이 들었다. 아직 산중턱도 못 갔는데 숨은 턱턱 막혔고 종아리, 허벅지, 발바닥까지 안 아픈 데가 없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산을 오르다 우연히 고개를 들었는데 팀장의 얼굴이 보였다.
황당했다.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는 그의 모습은 빛이 날 정도로 행복해보였다. 처음에는 그가 변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팀원들이 등산을 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느라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행복한 표정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팀장은 산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게다. 주말이면 전국 방방곡곡의 좋은 산이란 산은 다 찾아다니고, 심지어 휴가를 내고 히말라야를 등산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다. 그때야 비로소 팀장의 빛이 날 정도로 행복해보였던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누구든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언제나 얼굴에서 빛이 날 수밖에 없다.
팀장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노동과 놀이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다. 간단하게 노동과 놀이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고 가자. 노동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행동’이고, 놀이는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행동’이다. 내게 그날 등산은 노동이었고, 팀장에게 등산은 놀이였을 것이다. 내가 등산을 한 목적은 새로 부임한 팀장에게 찍히기 싫어서였다. 바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일요일 오전에 꾸역꾸역 관악산을 올랐던 게다. 하지만 팀장이 달랐다. 그는 표면적으로야 등산이 팀 단합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날 팀장에게 등산의 목적은 산에 오르는 것 그 자체였다. 누구보다 등산을 좋아했기에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수단이었다.
노동과 놀이의 설명은 얼추 된 것 같으니, 이제 우리네 삶으로 한 번 돌아와 보자.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까지 수많은 행동을 하며 산다. 그런데 그 수많은 행동 중 노동과 놀이 중 어느 것을 더 많이 하고 있을까? 아마 압도적으로 노동이 많을 게다. 먼저 학생들을 삶을 한 번 들여다보자. 아침에 일어나 학교를 가서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 가서 영어공부까지 정말 열심히 공부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그 공부는 죄다 노동이다. 공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자 수단이 아니다. 그 공부는 성적을 잘 받기 위한 혹은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거나 혹은 창업을 하면 상황은 달라질까? 그들은 또 하루 중에 얼마나 많은 놀이를 하며 살까? 직장인은 아침에 출근해서 늦은 밤까지 일을 하지만 그 많은 일 중 목적과 수단이 일치된 활동은 거의 없다. 그들이 보고서를 쓰는 행동은 돈을 벌기 위한 혹은 상사에게 칭찬 받고 인정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보고서를 쓰는 행동 자체가 수단이자 목적인 일은 아니다.
창업을 해도 상황이 그다지 달라지는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은 소수의 창업자들만이 목적이자 수단인 일, 그러니까 놀이를 할 뿐이다. 창업자들은 자신의 창업 이유에 대해 갖은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창업자들은 결국 돈을 벌고 싶은 것이다. 그들에게 일은 그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 혹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성공한 창업자라는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네 삶의 대부분은 그냥 불철주야 꾸역꾸역하는 노동을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목적과 수단이 합치된 행동을 얼마나 하고 있을까? 거의 없을 테다.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항상 어떤 대가나 보상을 은근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 있게 ‘운동은 놀이다’라고 말한다. 당황스러운 대답이다. 운동이 놀이라고 말하는 대부분은 운동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식스팩이나 근육질 몸매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몸매를 만드는 수단으로서 운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에게 운동은 수단과 목적이 유리된, 노동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운동을 좋아한다고 입버릇처럼 떠들던 사람들이 두꺼운 옷을 입을 수 있는 겨울이 되면 썰물 빠지듯이 체육관을 빠져나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 분명 놀이의 실종 시대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것이 행복한 삶이다!’라고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게다. 행복이란 것 자체가 다분히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이냐?’는 질문에 감히 대답을 해보자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삶에서 놀이의 영역만큼이 바로 행복이라고. 그러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불행하다면 그것은 삶에서 놀이의 영역은 거의 없고 노동의 영역만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쉽게 말하자면 ‘목적과 수단이 일치된 행동을 얼마나 많이 하고 사느냐?’가 곧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사느냐?’의 척도인 셈이다.
다시 팀장의 이야기로 돌아 가보자. 그는 그 고된 등산을 하면서도 얼굴에 빛이 날 정도로 행복해보였다. 그에게 산을 오르는 행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자 수단이어서였다. 돈을 벌려고 산을 오르는 것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산을 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유명한 등반가의 말처럼 ‘산이 거기 있었으니 오르는 것’일 뿐이었다. 놀이란 그런 것이다. 얼굴에 빛이 날 정도로 행복감을 주는 그런 활동 말이다. 그런데 정작 팀장에게 직장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평일 직장에서 행복하지 않았을 게다. 왜냐하면 그에게 직장의 일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을 테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에게 직장의 일은 등산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팀장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등산을 하는 시간을 늘리면 된다. 행복은 놀이의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데 있으니까.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목적과 수단이 일치되는 놀이의 영역을 넓혀 가야 한다. 취업을 위한 영어 공부 대신 소설이어도 좋고, 영화여도 좋고, 수영이어도 좋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는 행동 말고 그 행동 자체가 목적이자 수단인 놀이를 점점 더 많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놀이 따위를 할 때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우리가 노동을 하는 이유도 결국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아니었던가. 길을 잘못 든 것인지도 모른다. 행복을 찾아 가려면 놀이라는 길로 접어들었어야 했는데, 노동이라는 길로 열심히 뛰어가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쯤 되면 우리는 여지없이 현실적인 문제 부딪힐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도 모르겠다. “놀이만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싫어하는 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등산하는 게 좋다고 해서 등산만 하면 어떻게 먹고 살아? 혼자 소설책만 읽다가 취업을 못하면 누가 책임질 거야!”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일만해서는 현실적인 생활의 궁핍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런 현실적인 문제가 전혀 없다고 말하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놀이의 영역을 확장해나가야 한다. 물론 그 확장의 범위와 속도는 개인의 사정과 환경에 맞게 조절해야겠지만 말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박한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놀이의 영역을 조금 더 확장하면 될 게다. 행복에 대한 절박함이 덜 한 사람이라면, 놀이의 영역을 조금 덜 확장하면 된다. 그것은 개인이 처한 환경, 그리고 결단의 문제이니 누가 무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지면되는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자. 현실이 빡세고 척박하다하여 놀이라는 가치를 의미 없다고 여기거나 놀이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결단 부족으로 놀이를 선택하지 못해 불행한 것일 뿐, 놀이는 언제나 우리의 행복을 담보하니까 말이다. 사정이 있다고, 환경이 어렵다고 그래서 당장 놀이의 영역을 확장할 수 없다고 해도, 행복한 삶 자체가 의미 없다고 여기지는 말자. 행복한 삶 자체를 부정하게 될 때,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은 완전히 닫히게 될 수밖에 없다. 의미 없다고 부정했던 삶에 도달하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삶에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게다. 행복은 분명 있다. 놀이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