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를 찾는 세가지 열쇠 : 경험, 즐거움, 자발성
놀이의 감수성을 복원하는 방법은 경험뿐이다.
"삶을 행복하기 위해서는 놀이가 필요해요!"라고 말할 때 마다 돌아오는 답변이 있다. “저는 딱히 즐기는 놀이가 없어요.”라는 답변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 선생, 사회는 우리를 어떻게 훈육했었나? ‘밥 먹으면 만화 보여줄게’ ‘1등하면 자전거 사줄게’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 ‘열심히 일을 해야 돈을 벌 수 있어’라는 식이었다. 핵심은 ‘◯◯하면 ◯◯를 얻을 수 있다’는 식의 논리였다. 이것은 어떤 것을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한다는 측면에서 정확히 노동의 논리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목적과 수단을 분리시키는 사고방식을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뼛속까지 내면화했다. 그러니 당연히 지금 우리에게 수단과 목적이 일치하는 놀이의 영역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된 게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방과 후에 만화책을 빌려 행복한 기분으로 집으로 올 때면 엄마는 한심하다는 표정 말했다. “맨 날 돈도 안 되는 짓만 하고 있네, 공부나 해!” 구체적 경험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순수하게 좋아했던 놀이의 영역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아니 놀이는 부정적인 그래서 가급적 하지 말아야 할 어떤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게다.
잃어버린 놀이를 찾아야 한다. 어린 시절 흙장난, 딱지치기, 블록 만들기, 인형놀이, 친구들과 수다처럼 아무런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그저 그 행위 자체를 즐겼던 놀이를 찾아야 한다. 정확히는 그런 놀이의 감수성을 되찾아야 한다. 의무와 강압에 질식해가고 있는 우리에게 놀이의 감수성보다 절실한 것도 없다. 니체의 말처럼 ‘인간은 낙타에서 사자로 그리고 끝내는 아이로 돌아가야’ 하는 게다. 순수하게 놀이를 즐겼던 아이로. 하지만 어떻게 그 놀이의 감수성을 복원할 수 있을까? 놀이라는 것을 너무 오래전에 잃어버렸는데.
잃어버린 감수성은 그저 앉아 있어서는 복원되지 않는다. 특정한 사건을 동반했을 때만 가능하다. 내게는 ‘엄마 베개 냄새’와 유재하의 노래 ‘가리워진 길’이 그런 특정한 사건이다. 가끔 부모 집에 갔을 때, 어머니 방에서 잘 때 가 있다. 그때 어린 시절 ‘엄마 베개 냄새’를 맡게 될 때, 과거 엄마와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연히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을 듣게 될 때, 고민 많고 방황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과거의 감수성은 이렇게 특정한 사건을 경험할 때 복원된다. 이점이 중요하다.
잃어버렸던 놀이의 감수성을 찾는 방법도 이와 같다. 특정한 사건을 경험해야 한다. 특정한 사건을 능동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놀이는 지식이나 관념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것은 감각과 느낌의 영역에 있다. 그러니 놀이를 찾는다는 것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될 일이 아니다. 이런 저런 경험 통해서 그 놀이의 감수성 찾을 수밖에 없다. 만화책도 읽어보고, 소설책도 읽어보고, 수영도 한 번해보고, 노래도 불러보고, 글도 한 번 써 보고, 콘서트 장에도 한 번 가보고, 조각도 한 번 해보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봐야 한다. 그런 경험들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잃어버렸던 놀이에 대한 감각과 느낌이 복원될 수 있다.
놀이의 두 속성, ‘즐거움’과 ‘자발성’
여기서 놀이의 두 가지 속성에 주목하자. 놀이의 핵심적인 두 가지 속성은 ‘즐거움’과 ‘자발성’이다. 쉽게 말해서 어떤 일을 할 때 즐거운 일이 놀이라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이 즐거움은 너무 많이 오해되고 있다. 직장에서 하는 일이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럼 그에게 직장의 일은 놀이일까? 성급하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그가 느낀 즐거움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것은 업무를 하면서 느꼈던 크고 작은 성취감일 수도 있고, 새로운 업무를 할 때 느꼈던 자기 주도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세밀하고 깊이 살펴보면 그가 느낀 일에 대한 즐거움은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업무적 성취감이나 자기 주도적인 느낌이라는 즐거움은 분명 허상이다. 그 즐거움의 핵심은 사실 ‘월급’ 이다. 일을 하고 돈을 받으니 업무적 성취감도 느껴지고, 일을 주도적으로 한다는 만족감도 느껴지는 것이다. 즐거움의 핵심은 돈이다. 사실이지 않은가? 업무가 잘 마무리되지 않아도 월급날이 되면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고, 직장에서 남들이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 전혀 주도적이지 못한 업무를 맡게 되어도 월급이 2배로 오르면 기분은 아주 좋아질 테니까.
물론 직장의 일이 주는 즐거움이 오직 ‘월급’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가끔 월급이 오르지 않아도 일이 즐거울 때가 있다. 그럴 때 일이 즐거운 이유는 ‘칭찬’ 때문이다. 일 자체가 놀이처럼 즐거운 것이 아니다. 그 일을 잘함으로써 동료, 상사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을 들을 때 느껴지는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은 매혹적이다. ‘칭찬 받는다’는 것은 사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과 같다. ‘일이 즐겁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매혹적인 느낌이 주는 착시효과다. 일을 하면서 느껴지는 성취감이나 주도적인 느낌은 일 자체에 대한 즐거움이 아니라 칭찬, 인정에 대한 즐거움이다.
놀이의 속성으로서 즐거움은 결과로서의 즐거움이 아니다. 놀이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과정의 즐거움이다. 등산을 놀이로 삼고 있는 사람은 한 걸음 씩 산을 올라가는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조각을 놀이로 삼고 있는 사람은 조각칼로 나무를 한 움큼씩 파나가는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놀이가 주는 즐거움을 결과의 즐거움이라고 오해할 때, 하기 싫고 고된 노동을 잔뜩 하면서도 즐거움을 느끼는 자기 가학적인 변태가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자발적이지 않다면, 놀이가 아니다.
또 하나 놀이에 대한 중요한 속성은 자발성이다. 우선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하위징아’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그는 자신의 저서, ‘놀이하는 인간’이란 뜻인 ‘호모루덴스’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중략)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 있고 중지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놀이는 물리적 필요가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하위징아의 말처럼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다. 의무나 임무는 놀이가 아니다. 어떤 행위가 즐거움을 주더라도 그 행위를 하는 동기가 자발적이지 않다면, 그건 놀이가 아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팀장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어느 날 사장이 팀장에게 “자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고 매일 아침 7시부터 12시까지는 등산을 하게"라고 명령한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 며칠이야 좋아하는 놀이를 돈까지 받고 마음껏 할 수 있다고 좋아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점점 등산이 싫어질 것이다. 급기야 나중에는 등산이라면 쳐다보고 싶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운동을 너무 좋아해서 운동을 놀이처럼 즐기다 운동선수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운동이 좋아서 운동선수가 되었지만, 막상 운동선수가 된 이후에는 그 운동을 싫어하게 되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을 벌어졌을까? 운동선수가 된 이후에 감독이나 코치가 좋아했던 그 운동을 강압적으로 명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 좋아했던 운동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분명 강압적인 명령이나 의무는 즐거운 놀이를 교살시킨다.
행위의 동기가 자발적이지 않다면 놀이가 아니다. 누군가 강제하고, 의무로 준 일은 결코 놀이가 될 수 없다.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 삶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놀이는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것 아니다. 능동적으로 자신이 찾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여행이 놀이가 아니라 노동이 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찾아가는 여행 대신 임무처럼 주어진 인스턴트식 패키지 여행이 난무하는 까닭일 게다. 진정한 놀이를 찾고 싶다면,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삶에 뛰어들어야 한다.
우리는 놀이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찾을 수 있다. 결과 아니라 과정에서 즐거움을 주는 일들을 찾아 가면된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일들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져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삶에 뛰어 들면 된다. ‘즐거움’, ‘자발성’ 이 두 가지 속성에 주목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들을 쌓아 나가다보면 곧 놀이를 찾게 될 게다. 그리고 그 놀이를 놓지 않고 산다면 언젠가는 그 놀이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바로 그런 일, 놀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일에 ‘행복한 밥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그래, 맞다. 왜 밥벌이는 놀이처럼 행복하면 안 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