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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육체노동VS정신노동

인간불평등의 기원을 찾아서

정신노동 VS 육체노동

“성적이 이게 뭐야! 너도 정말 네 아빠처럼 평생 노가다 하면서 살래!” 중학교 시절 옆집 단칸방에 월세로 세 들었던 살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가 그에게 종종했던 다그침이었다. 나는 그 녀석이 좋았다. 아마 우리 둘이 친해진 결정적 계기는 우리 둘 다 공부를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성적표가 나오는 날, 우리는 학교 뒷산에 올라가서 시간을 때우다 집으로 늦게 들어가곤 했다. 성적표가 나온 날은 나보다 그 친구가 더 집으로 들어가기 싫어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가난에 찌든 엄마의 그 히스테리와 분노는 성적이 나온 날 유독 심했고, 엄마의 그 감정적 배설을 감당하기에는 그때 우린 너무 어린 나이였으니까.


친구의 어머니는 그가 공부를 잘하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했다. 아니 어머니는 친구의 성적이 나쁜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제 내가 부모가 되어 그때를 돌아보니, 그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도 없다. 막노동을 하는 남편을 만나 지금껏 월세 방을 전전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웠을 것이다. 자식에게만은 그런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가 성적이 좋지 않았을 때, 그리도 화를 내었을 것이다. 가진 것이 없는 집의 아이가 신분 상승을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공부뿐이란 걸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육체노동에 대한 거부감 혹은 부정적 인식이 남아 있다. 아마 그런 인식의 저변에는 그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소위 말하는 ‘노가다’는 고되고, 지저분하고, 그래서 처량한 것이라는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내 친구도 그랬을 게다. 세계 많은 나를 다녀 봤지만, 한국만큼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높은 나라도 없었다. 한국 부모들의 과도한 교육열의 본질은 육체노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있다고 생각한다. 내 자식만큼은 손에 기름때 묻히지 않고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 그리도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부분 부정하고 기피하는 육체노동은 도대체 정확히 무엇일까? 이 육체노동이 무엇인지 조금 깊이 한 번 알아보자. 육체노동(Physical labour)은 근육노동이라고도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육체노동은 몸을 쓰며 하는 노동 전반을 의미한다. 반면 정신노동(Mental labour)은 두뇌노동이라고 한다. 즉 정신노동이라는 것은 몸이 아니라 머리를 쓰면서 하는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해보면 육체노동이 정신노동보다 더 고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이 두 가지 노동에 사용되는 신체 범위를 생각해보자. 육체노동은 온몸 전체를 써야 하지만, 정신노동은 오직 두뇌만 사용하면 된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노동을 할 때 활동량이 정신노동에 비해 육체노동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육체노동의 노동환경이 정신노동보다 더 열악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다. 육체노동을 하는 장소는 깔끔하게 정돈된 실내보다는 거친 야외인 경우가 더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가 ‘우리 사회는 계급이 없는 민주주의사회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조금 거칠게 말해도 된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여전히 신분계급이 존재하는 일종의 봉건제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육체노동자과 정신노동자이라는, 두 가지 사회적 계급이 엄연히 존재하니까. 육체노동의 계급에 있는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일을 하지만 그 처우조차 좋지 못한 것 경우가 일반적이다. 반면 정신노동의 계급에 있는 사람들은 쾌적한 환경에서 덜 고된 일을 하지만 좋은 처우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육체노동 : 정신노동 = 1 : 1


‘민주주의’, ‘평등’, ‘사회적 정의’ 같은 골치 아픈 이야기는 접어두자.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더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이 덜 고된 일을 하는 사람보다 더 좋은 처우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아니 백 번 양보해 더 좋은 처우는 받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둘이 비슷한 처우정도는 받는 게 상식이고 정상 아닐까?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육체노동은 정신노동보다 좋지 못한 처우를 받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다수가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아주 정상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정치인의 슬로건처럼 ‘비정상화의 정상화’가 필요한 지점이 바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관계다.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이 더 고되다’라는 논의 자체가 사실은 무의미하다. 대표적인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기업체 사장, 변호사, 컨설턴트와 같은 소위 말하는 화이트 칼라들이 ‘정신노동도 육체노동 못지않게 고되다’라고 반박하면 그 뿐이니까. 노동 강도라는 것이 사실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신노동이라곤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노가다꾼에게 사장이 “내가 하는 노동도 네가 하는 것 못지않게 힘들어!”라고 말하면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여기서 정신노동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잠시 생각해보자.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에 정신노동이 존재했을까? 노가다로 예를 들었으니 노가다로 계속 가보자. 지금 건축가는 정신노동자로 분류된다. 건축가는 24층짜리 건물을 어떻게 지을지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계산하고 설계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 건축가가 현장에서 직접 땀을 흘리며 노가다를 하는 법은 거의 없다. 하지만 돈을 주고 아파트를 사는 자본주의 시대가 아니라 자신이 살 집은 자신이 직접 지어야만 했던 전(前) 자본주의 시대에는 어땠을까?


그때는 모든 사람이 육체노동자일 수밖에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육체노동자이면서 어느 정도의 정신노동자일 수밖에 없다. 집을 어떻게 만들지 직접 구상(일종의 설계)을 해야 하고, 그 구상에 따라 직접 나무를 자르고 대들보를 세우고 지붕을 만드는 육체노동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돈을 주고 집을 살 수 없는 전(前)자본주의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정신노동자요, 육체노동자인 셈이다. 말하자면 전(前) 자본주의 시대에서 노동이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란 개념을 분리할 수조차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영악한 자본주의라는 놈은 기어코 인간의 노동에서 의식을 분리해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가족들이 오붓하게 살 작고 소박한 집은 혼자 구상하고 지을 수 있지만, 24층짜리 아파트를 짓는 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정도 규모의 작업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머리 좋은 사람이 그 작업을 구상하고, 육체적 능력이 좋은 사람은 그 구상을 노동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 노동에서 의식이 분리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정신적이 능력보다 육체적 능력이 좋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혼자 혹은 가족들끼리 모여 살 집 정도는 직접 구상(설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 자본주의 시대는 너무 복잡해 많은 계산과 어려운 설계를 필요로 하는 24층 아파트만 아니라면, 누구든 자신의 집을 직접 지을 수 있는 시절이 있었을 게다. 하지만 더 크고 더 복잡한 집을 더 효율적으로 짓기 시작하면서 노동에서 의식은 분리 되었고, 그로 인해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구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확히는 육체노동이 소외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분리되었던 처음 시기에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처우가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정신노동을 굉장히 잘하는 건축가가 있다고 해보자. 그런 건축가 역시 자신의 정신노동을 구현해줄 소위 말하는 노가다꾼이라는 육체노동자가 없다면 애초에 건물을 지을 수조차 없었을 테니까. 분명 노동에서 의식이 분리된 첫 시기에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은 그 대우가 분명 1:1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정신노동자가 더 불리한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인간불평등의 기원을 찾아서


강건한 육체를 가진 육체노동자는 조금 투박하기는 할지라도 혼자서 자기 집 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허약한 육체를 가진 정신노동자는 강건한 육체노동자가 없다면, 자신의 집을 머릿속으로 구상할 수만 있을 뿐 실제로 집을 지을 수는 없었을 게다. 대표적인 정신노동자인 ‘빌게이츠’도 이런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육체적 능력이 중요했던 과거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의미의 말을 했던 것일 테다. 분명 육체노동이 정신노동보다 더 근본적이며 더 직접적이다. 그래서 더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육체노동자보다 정신노동자의 처우가 좋다. 근본적으로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장 자크 루소라는 철학자는 「인간불평기원론」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조그만 땅에 울타리를 치면서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기에 충분히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최초의 인간이 바로 시민사회의 진정한 기초자였다”


루소의 말이 어려울 것 없다. 땅이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던 시절에, 여기저기 깃발을 꽃아 ‘여기는 내 땅이야!’라고 자신의 소유를 처음 주장했던 머리 좋은 사람 때문에 인간의 불평등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루소는 사유재산은 허구라고 일갈하며, 나아가 사유재산제가 세계 갈등을 조장하며 갖가지 역사적 비극의 근원이라고 말했던 게다. 그렇게 시민사회가 형성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본주의가 형성되었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이제 정신적으로 영악하지 못했던 육체노동자는 자신의 힘으로 직접 집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당연하지 않나? 집을 지으려고 해도 어디 땅이 있어야 그 위에 집을 지을 것 아닌가? 비로소 불행이 시작된다. 이제 육체노동자들은 돈을 벌어 집을 지을 땅을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럼 돈은 어디서 벌어야 할까? 육체노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정신노동자가 구상한 24층짜리 건물을 짓는 노가꾼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육체노동은 그렇게 부당하고 억울하게 소외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모두 다 알다시피, 상황이 이 지경이 된 이후에는 그 어떤 노가다꾼도 건축가와 1:1의 처우를 말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직원도 사장과 1:1의 처우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정신노동자들 역시 자신이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몸뚱아리 이외에는 말이다. 정신노동은 고결하고 긍정적이며, 육체노동은 천하고 부정적이란 관념은 완전한 허구다. 일과 돈에 대한 건강한 태도를 갖기 위해 이 사실을 분명히 해두는 것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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