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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정신노동은 없다. 오직 육체노동이 있을 뿐이다.

정신노동은 허구다.

정신노동이라는 허구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정신노동은 더욱 고결한 것이 되었다. 100층짜리 건물을 구상한 건축가는 그 정신노동의 대가로 엄청난 돈을 받는다. 그 돈으로 몇 년간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육체노동자들은 고된 건설 막노동을 하면서도 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말이다. 이럴 때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체노동자들이 건축가에게 따져 물을지도 모른다. ‘넌 왜 아무 일도 안하고 잘 먹고 잘사느냐?’ 그때 머리 좋은 정신노동자는 드디어 대답하게 된다. ‘나는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 건물을 구상하고 설계하는 일을 하는 중이다’


여기까지 상황이 진전되면 이제 정신노동은 없다. 나는 대기업에서 횟수로 7년 동안 일했다. 내가 했던 일은 마케팅이었다. 그래서 경영층과 함께 일할 기회가 비교적 많았다. 그때 동료나 상사들은 늘 말했다. ‘사장님은 우리처럼 보고서를 쓰고 여기저기 직접 뛰어다녀야 하는 육체노동을 하지는 않지만, 말 못할 고민과 엄청난 정신노동을 하고 계실 거야’ 그네들의 말이 의아하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나도 정말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경영층과 함께 일을 하게 되면서, 동료와 상사들의 이야기가 현실과 조금 다르단 걸 알게 되었다.


실제로 내가 만나본 많은 경영층의 민낯은 조금 달랐다. 모든 임원과 사장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그들은 자신이 해야 할 정신노동, 예를 들자면 어떤 의사결정이나 고민마저 부하직원들에게 미루기 일쑤였다. 경영층은 직접 몸을 써서 해야 하는 육체노동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심지어 자신들이 응당해야 할 정신노동마저 직원들에게 전가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물론 그들도 일을 하긴 한다. 하지만 그런 임원이나 사장들이 하는 노동이라곤 부하 직원에게 상과 벌을 내리는 것뿐이었다. 마치 권좌에 앉은 왕처럼.


원룸 건물을 가지고 월세를 받아 생활을 하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그는 늘 ‘월세 받아먹고 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라고 강변했다. 건물 관리하고 세입자들 들어오고 나갈 때 계약을 해야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신경 써야 할 일, 그러니까 정신노동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하지만 그 사람을 유심히 살펴본 결과, 건물 관리는 어떤 노인 분에게 월급을 주고 시키고 있었고, 세입자 계약은 전담해주는 공인중개사가 따로 있었다.


사실 그가 건물을 운영해서 월세를 받는 데 들이는 노동은 객관적으로 거의 없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육체노동은 건물 관리자에게, 정신노동은 공인중개사에게 매달 들어오는 월세 중 일부를 떼어 약간의 급여만 주면 그뿐이었다. 그렇게 매달 고되게 뛰어 다녀야 하는 월급쟁이보다 더 많은 수입을 매달에 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강변한다. “월세 받는 게 어디 쉬운지 알아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의 말은 정말 사실인걸까?


정신노동은, 없다


정신노동은, 없다. 사실 정신노동이란 말자체가 난센스다. 노동의 사전적 의미는 ‘몸을 움직여 일을 함’이다. 그런데 정신만으로 하는 노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정신노동의 중요성을 부르짖는 사람은 사실 다른 사람의 것을 착취하는 사람이다. 노파심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지금 일반적으로 정신노동자라고 일컬어지는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은 사실은 정신노동자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정신노동자라고 일컬어진다고 하더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분명 육체노동자다.


누가 예술가를 정신노동자라고 할 수 있을까? 소설가는 정신노동자가 아니다. 글을 쓰는 것은 엄청난 육체노동이다. 몇 시간씩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면 팔, 어깨, 허리 안 아픈 데가 없다. 화가는 정신노동자가 아니다. 물감을 섞고, 그림을 그리는 그 과정은 분명 육체노동이다. 친구 중에 조각가가 있는데, 심지어 그는 조각을 오래 하다가 허리 디스크가 터졌다고 하니 조각보다 빡센 육체노동도 없는 것 같다.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한 젊은 변호사는 직접 의뢰인을 만나고 법원을 뛰어 다녀야 하는 그 많은 일을 직접 몸으로 하고 있다. 집에 돌아오면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다리가 아프단다. 변호사도 분명 육체노동이다. 누가 사무직 월급쟁이를 정신노동자라고 하는가? 벽돌을 짊어지지 않았을 뿐 손목이 아플 때까지 이러 저리 마우스를 돌리고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엑셀, 파워 포인트를 만들어 하는 노동을 어찌 정신노동이라 할 수 있을까? 모두 다 육체노동이다. 엄밀히 말해서 노동에 정신노동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에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대부분의 재벌, 건물세로 돈을 버는 건물주처럼, 돈이 많아 그 돈이 다시 또 돈을 버는 모든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에게 물어보라. 그들 중에 ‘나는 노동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말이다. 그들 역시 노동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단지 그 노동이 육체노동이 아니라 정신노동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대기업 재벌의 경영 행태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재벌은 골치 아픈 의사결정을 해야 하거나 깊은 생각해야 하는, 소위 말하는 정신노동을 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자신이 돈을 많이 주고 고용한 전무, 상무, 이사라는 진짜 정신노동자들에게 떠넘겨버린다. 세를 받는 건물주나 돈이 돈을 버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 어떤 노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도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기 때문에 정신노동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하나 차용해온 것일 뿐이다. 노동을 전혀 하지 않고 돈을 그것도 많이 번다는 것은 본인도 어딘가 모르게 찜찜할 테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신노동은 없다. 우리가 하는 모든 노동은 육체노동이다. 몸의 수고로움 없이 순수한 정신활동만으로는 그 어떤 생산적 활동도 할 수 없으니까. 노동은 곧 육체노동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노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착취해서 먹고 살면서 자신은 고결한 정신노동을 하고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게 될지도 모니까. 최소한 우리, 그런 기만적인 인간은 되지 말자.


정신노동이란 구호는 ‘남의 것을 빼앗아 편하게 먹고 살고 싶다’는 인간의 뿌리 깊은 이기심을 정당화하는 가장 오래된 레토릭이다. ‘일과 돈의 생활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행복한 삶은 몸의 수고로움을 긍정하는데서 온다는 것, 육체노동을 긍정하는데서 온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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