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 가장 쉬운 것은 ‘나’의 이야기를 ‘떠드는’ 것이다. 각가지 이유들로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며 산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이것은 쉬운 일인 만큼 의미 없는 일이기도하다. 손쉬운 떠듦은 언제나 자신만을 향한 떠듦이니까.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하고 늘 상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떠듦만큼 무의미한 이야기도 없다. ‘나’의 의미는 ‘너’로 완성되는 것이니까.
가장 어려운 것은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나’와 ‘씀’이라는 두 가지 사건 때문이다. ‘씀’부터 이야기해보자. ‘쓴다’는 행위는 왜 어려운가?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타인이 강제되기 때문이다. ‘쓴다’는 행위에 정성이 들어가는 이유는 누군가 읽을 것이라는 믿음이 항상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쓰기는 어려운 것이다. 누군가 계속 나를 보고 있다는 중압감은 쉬이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닌 까닭이다.
‘나’의 이야기를 쓰려는 이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은 강건해지기다. 타인의 시선이 남기는 중압감을 견뎌내려는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네가 좋아.” “나는 네가 싫어.” “나는 이 일을 좋아해,” “나는 그 일을 싫어 해” 이러 저런 삶들을 겪어내며 당당하게 ‘나’를 드러내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 훈련이 없다면, 우리가 쓸 수 있는 글은 고작 다수나 전문가 뒤로 숨는 남루한 글일 수밖에 없다.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강건함이 필요하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강건함.
2.
이제 ‘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나’는 내가 겪었던 무수히 많은 사건들의 배치(조합)다. ‘씀’에서 ‘나’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사건들의 배치가 무한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만 '쓰는' 사람은 드물다. 검열의 문제를 지나왔다면, 막연함과 혼란함의 문제에 다시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나의 수많은 이야기 중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오직 거울을 통해 나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씀’ 위해 찾는 거울은 ‘거울 숲’이다. ‘나’를 쓰고 싶은데 비치는 내 모습이 너무 많고 제각각이어서 쓸 수 없게 된다. 그 막연함과 혼란함에 ‘나’와 ‘씀’은 동시적 사건으로 연결되지 못하게 된다. 그냥 쓰면 되는 것을 잘 쓰고 싶은 과욕이 부른 결과다. '나'의 이야기를 쓰려면 이 문제 역시 해결해야 한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분열적인 ‘거울 숲’을 빠져나와 ‘단 하나의 거울’을 찾아야 한다. 수많은 ‘나’ 중에서 분명하게 쓸 수 있는 ‘나’를 비쳐줄 수 있는 거울. 그 거울은 누군가에게는 한 편의 영화, 소설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바둑이나 운동 같은 취미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단 하나의 거울'이 될 수 있지만 아무 것이나 '단 하나의 거울'이 될 수는 없다.
3.
'단 하나의 거울'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번째 조건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비춰주며 나에 대한 성찰을 촉발할 수 있는 거울이어야 한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어느 영화는 그저 유희거리로 지나가지만 어떤 영화는 가슴에 깊이 남는다. 왜일까? 그 영화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비춰주며 지난 내 삶을 성찰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테다.
만약 그 영화에 관해 글을 쓴다면, 그것은 영화에 관한 글이 아니다. 바로 ‘나’에 대해 ‘쓴’ 글이다. 그것은 수많은 ‘나’ 중, 쓸 만큼 혹은 써야 할 만큼 의미 있는 ‘나’였기 때문이다. 이 거울은 저마다 다 다를 수 있다. 누군가에는 ‘운동’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철학’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있는 수많은 ‘나’ 중, 성찰을 촉발하며 의미 있는 단 하나의 ‘나’를 비춰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 하나의 거울'에는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반드시 ‘나’를 아름답게 비춰주는 거울이어야 한다. 많은 난관을 헤쳐 나온다 할지라도, ‘나’를 ‘쓰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로 남는다. 그 어려운 일을 넘으려면 자신이 아름다워 보여야 한다. 자신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글을 쓸 수 없고, 쓴다하더라도 덕지덕지 화장한 글 밖에 쓸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 하나의 거울’이 억지스럽게 날씬하게 보이도록 만든 백화점 거울은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단 하나의 거울은 마법 거울과 같다. 단점과 어둠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비추지만 결코 못나게 보이지 않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순적인 말장난이 아니다. 어느 제자에겐 ‘철학’이 그런 거울이었다. 그 제자는 ‘철학’을 공부할 때면 드글거리는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점철된 시기심과 질투심 휩싸인 ‘나’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제자의 모습이 결코 흉측해보이지 않았다. 그런 단점과 어둠을 애써 직면하고 있는 제자의 모습은 반짝거렸다. 그 반짝임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그 제자는 ‘철학’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을 테다. 어쩌면 ‘나’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런 마법 같은 ‘단 하나의 거울’을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나’에 대해 쓰고자 하는 이들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컴퓨터를 켜는 일이 아니다. 어제보다 더 강건해져서 ‘단 하나의 거울’을 찾으려는 일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물며 ‘나’를 ‘쓰는’ 그 소중한 일이 공짜일리 있겠는가. 그런 공짜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