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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아는 것에 갇힌 사람들

잘 산다는 건, 신념과 유연함의 균형이다.

아는 것에 갇힌 사람들

나는 복서이기 이전에 공부하는 사람이고 글쟁이다. 그래서 가끔 공부 꽤나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 자신을 OO주의자라고 지칭하는 사람, 자신을 OO 전문가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그런 부류다. 사기꾼 같은 몇몇을 제외하고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분야에 대해서 정말 잘 알고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분야에서 기본기가 탄탄한 사람들인 셈이다. 하지만 특정 분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가 삶을 잘 살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삶은 수많은 타자들이 빚어내는 변화무쌍한 상황이 난무하는 실전이기 때문이다.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아는 것에 갇혀 경직된 삶을 사는 경우가 더 흔하다. 마치 내가 메써드 스파링에서 기본기에 충실하려다 움직임이 경직되었던 것처럼. 고백하자. 멀리 갈 것 없이 내가 바로 그런 부류였다. 아는 것에 갇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살고 있었다. 나는 철학을 좋아한다. 삶이 버거울 때, 철학에서 적지 않은 위로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동안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개인의 주체적 결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 말이 어려울 건 없다.



 ‘개인의 주체적 결단’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판단하고 선택하고 또 그것을 삶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식어버린 연인과 이별하는 ‘개인의 주체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을 비판했다. 또 돈을 버는 것 이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직장을 그만두는 ‘개인의 주체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을 비판했다. 그들이 주체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비겁함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이미 식었지만, 안주하고 싶은 오래된 연인의 익숙함은 버리고 싶지 않다는 비겁함. 아무 의미도 없는 직장이지만, 안주하고 싶은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비겁함. 


 ‘개인의 주체적 결단’을 은폐하거나 보류하는 모든 이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어느 날 한 철학자와 짧은 논쟁이 붙었다. “결국 주체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건, 그들이 비겁하기 때문 아닌가요?” 내 질문에 철학자는 답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죠? 전 아니라고 봅니다.” 그 철학자 역시 교묘한 논리로 비겁함을 합리화하려는 자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언성을 높이며 재차 물었다. “비겁하지 않은 자가 어떻게 주체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있죠?” 철학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혹시 지적 장애인과 생활해본 적 있나요? 그들은 어떤 대체 주체적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들이 주체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건 비겁하기 때문일까요?”


 순간, 멍해졌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젠장,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것들이 얼마나 협소한지, 또 그 알량하게 아는 것들을 삶이라는 변화무쌍한 상황에 얼마나 폭력적으로 적용하려고 했는지. 링 위에서 기본기에 집착하느라 나무토막처럼 경직되었던 거처럼, 삶에서도 아는 것에 집착해 나무토막처럼 경직되어있던 셈이다. 링 위에서 경직됨이 내가 얻어터지는 것으로 끝난다면, 삶 위에서 사유의 경직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더 늦기 전에 허접한 자신을 깨닫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잘 산다는 건, 신념과 유연함의 균형이다.

메써드 스파링 그리고 철학자와 논쟁에서 내가 배운 건 두 가지다. 첫째, 링이나 삶이나 모두 통제 불가능한 변화무쌍한 상황의 연속이라는 것. 둘째, 링과 삶에서 잘 대처하기 위해서는 유연해야 한다는 것. 기본기에 갇힐 때, 아는 것에 갇힐 때 우리네 삶은 경직될 수밖에 없다. 유연해야 한다. 물론 유연해야 한다는 말이 기본기도 전혀 없이 링 위에서 무대뽀로 주먹을 휘둘러야 한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삶에서 아는 것도 없이 그저 상황에 따라 휩쓸리며 살아야 한다는 걸 의미하지도 않는다. 


 진짜 아는 것은 신념이 된다. 신념은 중요하다. 이 신념이 바로 우리네 삶의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신념이 될 때, 자기중심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고 살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아는 것이 신념이 될 때, 경직될 준비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신념이 된, 아는 것은 결코 의심받지 않으며, 그것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무조건 적으로 간주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그렇게 살면 자신의 신념은 지킬 수 있을지 모르나 삶을 잘 살지는 못할 게다. 그런 삶은 기본기에 집착하느라 뻣뻣하게 복싱을 하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다.


 삶을 잘 살기 위해서는 결국 두 가지가 필요하다. 신념과 유연함.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중심을 잡아줄 신념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에 갇혀서는 안 된다. 수많은 타인과 다양한 조건이 얽히고설켜서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렇게 삶 앞에서 유연해짐으로써 자신의 신념도 더 근사하게 세련되어져 갈게다. 마치 훌륭한 복서들이 변화무쌍한 상황이 난무하는 스파링이나 시합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자신만의 세련된 기본기를 갖추게 되는 것처럼. 복싱에서 삶을 배우고, 삶에서 복싱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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