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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시선, 비평가의 시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극화dramatization하려는 경향이 있다. 꽤 잘 맞는 직장을 찾았을 때 그것을 “천직을 찾았다”고 말하고, 꽤 매력적인 이를 만났을 때 “운명이다”고 말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이는 자신의 삶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특별한 어떤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테다. 자신의 삶을 극화하려는 태도는 부정적인 것일까? 그것은 유치한 자기애일까? 그렇지 않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모든 사람은 그들 삶의 주인공이다. 모든 이들은 어느 영화 속 주인공들이다.  조연에겐 서사가 없지만 주인공에게는 서사가 있다. 주인공의 삶은 매순간이 서사narrative다. 영화 전체를 이끌고 나가는 서사. 우리가 하루를 사는 것은 영화 속의 주인공의 시점일 수밖에 없다. 삶은 ‘나’를 주인공이게끔 하게 하는 조연과 엑스트라들로 구성된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극화시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는 당연한 일인 동시에 필요한 일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철학을 공부하며 글을 쓰는 생활을 시작했다. 시작한지 얼마나지 않아 알았다. 철학과 글로 돈을 벌기는커녕 다른 일을 해서 철학을 공부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걸. 그때 나는 얼마나 쪼그라들었던가. 그보다 나를 쪼그라들게 했던 것은 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주변인들이 내게 보인 시선의 종류는 딱 세 가지였다. 비난하거나 동정하거나 무관심하거나.


 그 한없이 쪼그라들던 시간들을 버티게 해준 것은 내 삶의 극화였다. “나는 지금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는 삶의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위대한 일을 해나가고 있는 거야!”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그렇게 주인공의 시선으로 자기면을 걸었다. 그런 극화가 없었다면 우울증에 빠져 술을 퍼마시며 신세한탄만 하고 있는 글 쓰지 않는 글쟁이가 되었을 테다.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자신의 삶이 위기에 빠져 있는 경우는 특히나 그렇다.

     


 하지만 극화만으로는 삶을 제대로 살아내기 어렵다. 매순간 자신의 삶을 극화하기만 하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유아적인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세상에 엄존하는 타자를 보지 않고 모든 대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유아적 나르시시스트. 세상에서 자신만(혹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인정한 타자만) 중요하며 모든 일을 자신의 중심으로 해석하는 유아적 나르시시스트. 극화뿐인 삶은 작게는 이기심이 되고, 크게는 정신착란이 된다.

  

 극화가 자신을 바라보는 주관적 시선이라면 또 하나의 시선이 있다. 객관적 시선이다. 냉정할 정도로 차갑게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주관적 시선이 ‘주인공’의 관점이라면, 객관적 시선은 ‘비평가’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필요하다. '주인공'의 시선으로 삶의 위기를 어느 정도 지나왔다면, '비평가'의 시선이 필요하다. 어느 차가운 비평가가 나를 객관적으로 해체할 그 시선으로 나는 나를 본다.       


 여전히 철학을 공부하고 글을 쓰고 있다. 분명 '주인공'의 시선에 빠져 있을 때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더 나은 글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주인공의 시선이 아니라 비평가의 시선에 더 익숙하다. 지금 내가 해나가는 일들이 대단히 중요하거나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에 나 혹은 나의 사유와 성찰이 특별하거나 대단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나 역시 생계를 위해 일하는 여느 노동자임을, 그저 우연적인 사건들로 인해 여기 있게 된 것임을 알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주인공인만큼 내 곁에 있는 이들 역시 저마다의 유일한 서사를 가진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모순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비평가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일 테다. 어쩌면 나의 철학과 나의 글이 예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다면, 그것은 '주인공'의 시선 너머 '비평가'의 시선으로 내 삶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의 시선 너머 '비평가'의 시선이 필요하다. 거기에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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