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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와 '욕망' 사이에서

'욕망'을 따르려는 자, '의무'에서 눈을 떼고 '욕망'을 보라!   황진규


1.

인간의 삶은 다양한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것이 우리네 삶에서 불안과 우울 그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얽혀있는지 도대체 알 수 없기에 명확한 이유도 모른 채 시도 때도 없이 불안하고 우울한 것이다. 하지만 그 얽힘은 사실 다양하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삶의 얽힘은 근본적인 두 원인의 얽힘이기 때문이다. 의무와 욕망. 우리가 겪는 동시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중핵에는 이 두 가지 얽혀있다. ‘해야만 한다.(의무)’와 ‘하고 싶다(욕망)’의 갈등이 거의 모든 불안과 우울의 토대다.      


 학창시절의 왜 불안하고 우울했던가? 공부해야만 한다는 ‘의무’와 놀고 싶다는 ‘욕망’이 늘 충동하고 있었기 때문 아닌가? 직장인들은 왜 불안하고 우울한가? 돈을 벌어야만 한다는 의무와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늘 충돌하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우울한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들은 모두 ‘의무’와 ‘욕망’의 충돌이 남긴 부산물들이거나, 그 충돌을 외면하기 위한 도피처들일 뿐이다. ‘의무와 욕망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 우리네 삶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우회하고서는 유쾌하고 명랑한 삶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원론적인 답은 간명하다. ‘의무’는 무시하고 ‘욕망’을 따르면 된다. 하지만 이 원론적인 답은 현실적이지 않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우선은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가 있다는 점이다. '의무'(공부해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를 무시하고 '욕망'(놀고싶다, 자유롭고 싶다)을 따른 학생과 직장인은 어떻게 될까? 안 봐도 비디오다. 의무를 무시하고 욕망을 따른 비용(슬픔)을 지불해야 한다. 흔히 이것을 가장 문제 여기지만 사실 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의무를 따르는 삶과 욕망을 따르는 삶을 진지하게 횡단해보았던 이들은 안다. 의무를 따랐을 때 치러야 할 비용(슬픔)보다 욕망을 따랐을 때 치러야 할 비용(슬픔)이 훨씬 적다는 걸. 당연하지 않은가? 의무는 슬픔이고, 욕망은 기쁨이니까.



2.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온통 ‘의무’에만 마음이 쏠려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의무'를 충실히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학창시절 공부해야 한다는 '의무'에 질릴 때로 질려버린 아이를 알고 있다. 그 아이는 '의무'는 슬픔이며, '욕망'은 기쁨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나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거야!”라고 마음먹었다. 누구보다 영화를 좋아했던 아이는 멀쩡히 다니던 학교마저 그만두고 영화를 배우러 다녔다.      


 그 아이는 욕망을 따르는 삶을 이뤘을까? 아니다. 그 아이는 이내 영화마저도 시큰둥해졌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영화가 그 아이의 진정한 욕망이 아니었던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긴 시간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욕망'을 따르지 못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의무' 때문이었다. 영화를 배우러 갔던 어느 곳에서 봐야 할 좋은 영화를 20편을 추천해주었다고 했다. 그 아이는 그 순간 영화가 싫어져버린 것이었다. 공부해야만 한다는 그 지옥 같은 '의무'의 냄새를 영화에서도 맡아버렸기 때문이다. '의무'가 기묘한 방식으로 '욕망'을 교살해버린 셈이다.  


 그 아이는 욕망을 따를 수 없을 테다. 정작 그 아이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욕망’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에게 호된 야단을 쳤다. “너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있는 게 아니다. ‘해야만 하는 일’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지” 호된 야단은 비난이 아니라 노파심 때문이었다. 그 아이는 어떤 욕망과 마주치더라도 이내 그 욕망은 증발해버릴 것이다. 어떤 욕망이라도 그 속에 의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해야만 하는 일’ 안에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 안에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전자는 소극적인 욕망이고, 후자는 적극적인 욕망이라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이 삶의 진실이다.


 진정으로 '욕망'을 따르는 살고 싶다면, 역설적이게도 '의무'를 참아내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기껏 찾은 ‘욕망’ 앞에서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의무’의 냄새를 느끼자마자 '욕망'을 포기해버릴 테니까. '욕망'을 따르고 싶다면, '욕망'을 보아야한다. 이 당연한 말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욕망'을 욕망하면서 '의무'만을 보고 있는가. '의무'가 없는 곳에 '욕망'이 있지 않다. '욕망'이 있는 곳에 '의무'가 있다. 기쁜 의무. 철저히 욕망을 따른 이들은 알고 있다. 욕망이 의무마저 껴안는다는 사실을. 기쁜 욕망이 의무마저 기쁘게 만든다는 사실을. 욕망을 따르려는 자, 의무에서 눈을 떼고 욕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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