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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배울 때 유의사항

효율은 개나 줘라. 황진규


철학을 공부할 때 유의사항이 있다. 배움의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단순한 배움이 아니라, 삶에 관한 배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철학이 난해한 또 하나의 이유일 테다.   

   

 배움(앎)은 그냥 배우면 된다. 예컨대, 역사를 배운다 치자. 그러면 연대기 순서로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가면 된다. 다른 배움도 마찬가지다. 일단 목차를 보고, 1장을 완벽히 소화하고, 2장으로, 그리고 3장으로 … 이런 식으로 배워나가면 된다. 이것이 우리의 배움의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배움의 유일한 방식이 아니다. 이는 효율을 중시하는 근대적 교육이 고안한 배움의 방식일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기능적인 앎은 배울 수 있을지 몰라도, 철학적 앎은 배울 수 없다.           


 철학적 앎이란 삶에 대한 앎이다. 삶에는 일목요연한 목차나 순서 같은 건 없다. 언제나 삶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 그러니 철학적 앎을 어떻게 기능적인 앎을 배우는 방식으로 알 수 있겠는가. 시작도 끝도 없이 무질서하게 뒤엉켜 있는 것을 어떻게 목차와 1장, 2장, 3장 따위로 배울 수 있을까. 기능적 앎을 익혔던 방식으로 철학을 공부하면 짜증스러운 현기증에 시달릴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일단은 효율을 버려야 한다. 더 정확히는 효율적 학습이 주는 그 기만적 충족감("오늘은 1장 다 끝냈어!")과 헛된 조바심("아직 1장도 다 이해 못했는데")을 내려 놓아야 한다. 혼란스럽고 뭐가 뭔지 모르는 것 같은 그 불쾌감과 답답함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 불쾌감과 답답함의 시간을 충분히 견뎌내면 마치 단박에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깨닫게 된다. “아, 이런 것이구나!” 안개 너머의 선명한 세상을 보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불쾌하고 답답한 안개를 견디며 한 걸음씩 내딛는 것.     


 철학도 그렇다. 불쾌함과 답답함을 견디며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철학을 공부하며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내게 무엇인가를 배우러 왔던 한 친구에게 해주었던 말을 철학을 배우려는 이들에게 다시 돌려준다.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럽고 불투명한 것들은 여백으로 남겨둬요.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테니까요. 제게 배우려면 먼저 배움의 방식 자체를 고민해봐야 해요. 저는 삶의 진실을 알려주고 싶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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