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치페이는 사랑이 아니다.

바나나맛 우유에 바나나는 없다.


“사랑하고 싶은가?” 이보다 잘못된 질문은 없다. “사랑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제대로 된 질문이다. 사랑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역량’의 문제다. 유사사랑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은 반드시 그렇다. 그렇다면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은 무엇인가? 섹시한 몸매인가? 매력적인 얼굴인가? 화려한 옷차림인가? 아니면 많은 돈인가?그런 것들은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이 아니다.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은 무엇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역량이다. 우리는 왜 사랑하지 못하는가? ‘너’의 등에 칼이 꽂혀도 ‘나’의 손에 박힌 가시를 더 아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너’를 사랑할 수 없다. ‘내’ 것이 아까워 ‘너’를 아끼지 못한다. ‘내’ 상처만 보고 있기에 ‘네’ 상처를 보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일일까?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너’보다 ‘나’를 더 소중히 대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적 조건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래서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할 역량이 있는 이들만 사랑할 수 있다. ‘나’를 조금 덜 사랑하고 ‘너’를 조금 더 사랑하는 마음은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량이 필요하다. 언제나 자기중적이고 이기적인 ‘나’를 돌아보려는 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역량.


사랑의 표어는 간명하다. “네 뜻대로 하고 싶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역량이 없다면, 사랑은 없다. 사랑할 역량이 없는 이들이 하는 사랑은, 사랑을 가장한 암묵적이고 은근한 ‘계약’이다. “내가 이걸 해줬으니 너도 이걸 해줘!” 이런 사랑은 '바나나맛 우유'다. 인공첨가제(사랑의 형식)로 바나나(사랑) 맛을 내고 있지만 정작 바나나는 없다. 이는 사랑의 형식을 띄고 있는 유사사랑일 뿐이다. 사랑하려면, ‘나’라는 중심을 버리고 ‘너’라는 중심의 위성이 되어야 한다. 지독히도 자기중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내려놓으려 애를 써야지만 겨우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사랑 안하고 말지.” 이즘 되면, 볼멘소리를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 있다면 그래보라. 누구와 함께 있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았던 불안, 공허,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을까. 그 슬픔은 사라지기는커녕, 나이가 들수록 점점 커져 자신을 집어 삼키게 되는 슬픔들이다. ‘나’밖에 모르는 이들이 결국은 불안, 공허, 외로움에 잠식당하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두운 세상에 ‘나’밖에 없는 이들이 어찌 불안하지 않고, 공허하지 않으며, 외롭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불안, 공허, 외로움이라는 슬픔의 유일한 해독제는 사랑뿐이다. 사랑하는 이들만 심연의 불안, 공허,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나’를 버리고 ‘너’에게로 갈 때, ‘너’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 빛은 선명하기에 불안을 녹이고, 빛은 가득 차 있기에 공허를 채우며, 빛은 너이기에 외로움은 없다. 사랑하는 이들만 진정으로 행복하다. 녹아버린 불안, 채워진 공허, 사라진 외로움의 자리에 기쁨이 들어서는 까닭이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다. 그것이 선택이라면, ‘사랑해서 기쁘게 살 것인가? 사랑하지 않아서 슬프게 살 것인가?’의 선택뿐이다. 사랑은 역량의 문제다. 그 역량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이와 더치페이 하지 않을 역량이다. ‘너’를 위해 ‘내’ 돈을 아낌없이 쓸 수 있는 역량이고, 그러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고된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이다. ‘너’가 조금 더 편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역량, 그러기 위해 ‘내’가 조금 더 힘들고 불편해지는 것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다. “사랑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아프게 다시 물어야 한다. “사랑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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