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자기계발이 아니다.

사랑을 하면 더 나은 '나'가 되지만,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한 사랑은 없다.
황진규



“저는 돈이나 외모 같은 거 안 봐요. 배울 게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에요.”


너무 긴 시간 혼자 있었기 때문일까? 누군가에게는 평범했을 대화에서 당혹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자신은 성숙한 사람이라는 듯, 그런 자신을 칭찬해달라는 듯,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서 말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이전에도 배울 것이 있는 사람과 연애를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 친구는 연애를 시작할 때 상대의 돈이나 외모를 보지 않는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당혹감을 뒤로하고, 그 친구에게 말해주었다. “연애 하지 말고 학원을 가요.”


그 친구는 그제서야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은 당당한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일임을 희미하게나마 깨달은 것일 테다. “나는 돈 많은 사람이 이상향이야”와 “나는 배울 게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야”는 같은 말이다. 사랑의 대상을 도구로 여기고 있다는 측면에서 둘의 정서 상태는 정확히 같다. 병적인 자본주의는 모두 돈, 돈, 돈거리며 살게 만든다는 단순한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돈, 돈, 돈 거리게 만듦으로서, 단순히 돈만 쫒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사람을 꽤 훌륭한 사람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더 치명적 문제다.


배울 게 있는 사람에게는 배우면 되지, 왜 그를 사랑하려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다. 이는 “왜 돈 있는 이를 사랑하려할까?”라는 질문의 답과 같다. 의존성과 소유욕 때문이다. 돈 많은 이를 사랑하려는 이들의 특성이 있다. 의존성과 소유욕이 강하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지만 동시에 많은 것들을 손쉽게 소유하려 한다. 돈은 소유하고 싶지만 주체적으로 돈을 벌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돈 많은 이와 독점적(사랑) 관계를 맺음으로 돈을 손쉽게 소유하려 하는 것이다.


배울 게 있는 사람과 사랑하려는 이들 역시 그렇다. 그들은 의존적이고 소유욕이 강하기 때문이다. 지적 욕구를 채우고 싶지만 주체적으로 공부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니까. 그래서 아는 것이 많은 이와 독점적(사랑) 관계를 맺음으로써 지적 발전을 손쉽게 소유하려 하는 것이다. 자신의 지적 발전을 위해 한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비단 지적 만족에만 머물지 않는다. 정서적 만족까지 나아간다. 자신의 불안한 정서 상태를 안정화시키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의존적이며 소유욕이 강한 이들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보이는 이와 독점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것을 손쉽게 소유하려 한다.


상대를 도구화시키는 모든 관계는 거래지, 결코 사랑이 아니다. 물론 거래적 관계를 횡단하며,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거래적 관계를 사랑으로 오인할 때, 거래에서 사랑으로 옮겨가는 길은 막혀버린다. “나는 의존성과 소유욕으로 유사사랑을 하고(바라고) 있다”는 뼈아픈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그 성찰만이 거래 너머 사랑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테니까 말이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났을 때, 그 아이가 부끄러워하며 말했으면 좋겠다. “배울 게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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