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성복
사람들은 관계에 이름을 붙인다. 친구, 연인, 부부, 부(모)자. 이는 기쁨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관계의 이름은 진정한 삶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첫째 아이가 어렸을 때, 컵에 장난감을 담아 보관했다. 자신이 특별히 소중하게 여기는 장난감들은 모두 컵에 담아놓았다. 그렇게 아이는 컵마저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첫째는 이제 그러지 않는다. 컵에 ‘컵’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컵에 ‘컵’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컵은 음료를 담는 용기가 된다. 더 이상 장난감을 담을 수 없다. 그렇게 컵은 사랑의 대상에서 멀어져버렸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이토록 슬픈 일이다. 누군가를 만나 관계가 시작될 때 먼저 우리는 붙일 이름을 찾는다. 친구냐? 동료냐? 연인이냐? 선생이냐? ‘관계의 이름’을 내면화했을(정했을) 때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며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삶을 돌아보라.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 그 관계가 하나의 관계성으로 정의될 수 있을 때가 있었던가. 연인은 오직 연인일 뿐일까? 그런 일은 없다. 좋은 연인은 때로 친구 같고, 때로 동료 같고, 때로 부모 같고, 때로 자식 같고, 때로 선생 같다. 관계는 언제나 그런 모호성과 다질성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관계든, 하나의 관계성으로 이름붙일 수 없다. 관계에 하나의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사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컵’이라는 이름 때문에 더 이상 컵을 사랑하지 않게 된 아이처럼. 그 남자(여자)와의 관계에 ‘부모’ ‘연인’ ‘친구’ ‘동료’라는 이름표를 붙일 때, 우리는 그 남자(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게 된다. 하나의 관계 속에 숨어 있는 잠재적인 사랑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모호한 관계, 다질적인 관계. 그 관계를 그 자체로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쉽사리 관계에 이름표를 붙여서는 안 된다.
물론 '관계의 이름'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사후적이다. 좋은 '친구'를 떠나 보내며 말하지 않던가. 그녀는 나의 '연인'이었다. 좋은 '연인'을 떠나보내며 말하지 않던가. 그녀는 나의 '엄마'였다. 좋은 '엄마'를 떠나 보내며 말하지 않던가. 그녀 나의 '친구'였다. 이렇듯 하나의 관계 속에 모든 관계가 있고, 모든 관계는 하나의 관계 속에 있다. 관계의 이름은 그저 그 관계가 모두 지나갔을 때 붙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관계에 이름을 붙이지(내면화하지) 않고 모호하고 다질적인 상태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 뿐이다.
나는, 다시, '컵' 속에 사랑하는 이의 편지를 담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