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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의 고통

첫째 아이가 돌을 지났을 무렵이었을까. 걸음마는 시원찮은데, 마음만 앞서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다 이리저리 넘어져서 팔, 다리, 이마 할 것 없이 다치곤 했다. 직장에서 한 참 바쁠 때였지만, 아이가 걱정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온통 머릿속에 아이 걱정이 가득해서 고통스러웠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혀 있던 그때의 나는 아이를 낳은 것을 후회했다. 아이 걱정에 온 정신이 팔려 업무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걱정의 고통이 있다. 누군가를 생각할 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런저런 걱정. 그 걱정에 마음이 매여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아프지는 않은지, 다친 것은 아닌지, 혼자 울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사람의 걱정에 온 마음이 사로잡혀 하루를, 또 이틀을, 그리고 나흘을 보내는 것의 고통은 괴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직장에서 일을 해도, 정신없는 영화를 봐도,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도 그 걱정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고통을 경험해본 이들은 다시는 그 고통을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걱정의 고통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 걱정의 고통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함께 할 때의 즐거움이 사랑을 증명하지 않는다. 함께 할 때 즐거운 사람은 얼마나 흔하던가. 그 흔한 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한 사람의 걱정 때문에 고통받는 것. 그것이 사랑을 증명한다. 돌아보라. 우리 주변에 흔한 이들을 걱정하는가? 걱정하는 척할 뿐, 걱정의 고통은 없다. 우리는 오직 한 사람을 사랑할 때만 걱정의 고통에 빠져든다.

      

 안다. 걱정의 고통을 겪은 이들이 주춤거릴 수밖에 없다는 걸. 그 고통은 괴롭기 그지없으니까. 차라리 사랑하지 않아서 그 고통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걱정의 고통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걱정의 고통이 사라진 자리에 언제나 불안이 들이닥치는 까닭이다. 사랑을 제거한 이들이 끝내 도착하는 곳은 공허와 불안의 세계일 뿐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삶이 무슨 의미 있다는 말인가.     


 홀로, 말없이, 걸으며 걱정의 고통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걱정의 고통을, 고된 훈련으로 일그러진 귀처럼, 나의 자부심으로 삼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걱정의 고통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위안 삼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걱정의 고통을 견디며 외딴 곳을 한참을 걷다가 알았다. 그 시절 나는 ‘아이’를 참 많이도 사랑했구나. 지금 사랑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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