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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과 조연 너머

서암 사언 화상은 매일 자신을 주인공아!” 하고 부르고 다시 스스로 !” 하고 대답한다. “늘 깨어있어라!” “!” “남들에게 속지 마라!” “!” 瑞巖彥和尚每日自喚主人公復自應諾乃云惺惺著他時異日莫受人瞞喏喏.   <무문관 제12> 암환주인巖喚主人            

    

겉모습을 꾸미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하지만 평소에 입지 않던 옷과 신발 꺼내 입고 머리도 단장했다. 함께 공부했던 이들의 작은 콘서트에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연주하고 노래하는 아이들은 무대에서 빛났고 아름다웠다. 그들의 빛나는 무대를 보며 오랜만에 정말 신나게 소리치며 놀았다. 신나는 하루였다. 신나는 하루를 보내고 그 하루를 정리하고 싶어졌다.       


 공연이 시작되자,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관객이 되었다. 무대의 주인공을 빛나게 밝혀주는 조연으로서의 관객. 주인공이 되지 못해 불만인 조연이 아니라, 주인공을 빛나게 해주어서 너무나 행복한 조연이 되었다. 무대 위에서 빛났던 아이들의 미소가 내 삶을 밝혀줄 만큼 조연이서 행복했다.   


  

 나는 어떻게 행복한 조연이 될 수 있었을까? 그날 한껏 꾸몄기 때문이었을 테다. 나는 왜 꾸몄을까? 콘서트에 대한 예의? 아니다. 일가친척 결혼식에도 대충 입던 옷을 입고 가는 나 아닌가. 나는 예의에 별 관심이 없다. 정성 껏 단장해 소중히 여기는 이들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바로 그것이 내가 기쁜 조연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을 테다.      


 누구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이 빛날 무대가 있어야 한다. 작은 공연이도 좋고, 애틋한 연애여도 좋고, 가족이어도 좋고, 글쓰기여도 좋고, 운동이어도 좋다. 누구나 빛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자신 이외의 사람들을 모조리 조연으로 전락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주인공만이 기꺼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되지 못한, 자신이 빛날 무대가 없는 이들은 셋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주인공을 시기하는 무대 밖의 무명이 되거나, 주인공을 향한 질투에 휩싸인 조연이 되거나, 아니면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주인공이 되지 못한 이들은, 주인공-조연이라는 거친 이분법 밖에 모른다. 이것은 또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하지만 주인공이 되어 기쁜 마음으로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조연이 되어본 적이 있는 이들은 안다. 주인공-조연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기적은 어렵지 않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신나는 하루, 그 작은 공연장의 기적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날 함께 즐거웠던 그 곳에는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나는 또 예쁘게 단장하고 세상에 나설 테다. 나만 주목받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내가 아끼는 이도 그랬으면 좋겠다. 예쁘게 단장하고 주인공이 되어 누군가를 기쁜 마음으로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주인공 잘 있었는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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