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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의 논리' 너머 '사랑의 논리'로

'너'는 '나'의 엄마.
'나'는 '너'의 엄마.

사랑할 때, '사랑받는 이'를 '엄마'처럼 사랑해요. 자신을 지키려 하지 말고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겨요.  그것이 '사랑하는 이'의 의무에요.

사랑 받을 때, '사랑하는 이'를 '엄마'처럼 사랑해주어요. 상대를 심판하려 하지 말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줘요. 그것이 '사랑받는 이'의 의무에요.

그렇게 사랑하게 되었을 때, 분석가-분석주체 사이의 분석은 필요 없어요.
우리는 항상 분석주체(사랑하는 이)이며 동시에 분석가(사랑받는 이)이니까요.  
분석 너머에 사랑이 있어요.       

                     


라캉보다 인간(정확히는 인간의 무의식)을 깊이 들여다본 이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라캉에게 인문주의자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인문주의자는 누구인가?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밝음과 어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자이고, 그런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가능성을 긍정하는 자다. 그래서 진정한 인문주의자는 ‘신’의 힘, ‘국가’의 힘, ‘자본’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인간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밝음과 어둠이 뒤엉킨 인간이라는 존재를 긍정하며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자. 그가 진정한 인문주의자다.   

   

 라캉은 인문주의자인가? 라캉은 누구보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려했다. 인간의 밝음(의식)과 어둠(무의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려 했다. 그런 측면에서 라캉은 인문주의적 속성이 있다. 하지만 라캉에게는 반-인문주의적 속성 또한 있다. 라캉은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가능성을 긍정하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의 문제를 동등한 인간들 스스로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이는 라캉이 늘 힘주어 했던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내 가르침의 목적은 항상 정신분석가를 양성하는 것이었고, 이는 지금도 그렇다.” 자크 라캉     


 라캉은 분명히 말한다. 자신의 가르침의 목적은 정신분석가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정신분석학의 핵심은 분석에 있다. 즉, 정신분석학은 ‘분석가(의사‧상담사)-분석주체(환자‧내담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석 행위를 위한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인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려는 인문주의적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분석가는 분석 밖에서만 동등한 인간일 뿐, 분석 안에서는 신이고, 국가이고, 자본이다. 쉽게 말해, 분석주체에게는 분석가는 거부할 수 없는 권력이 된다. 분석(이 제대로 이루진다는 가정)안에서 분석주체(내담자‧환자)는 분석가(상담사‧의사)에게 정서적으로 모든 것을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기초 세워졌다는 선의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라캉이 사랑한 사람은 '환자'일 뿐이었다. 라캉은 '환자'에게 애정이 있었을 뿐, '보편적 인간'에게는 그만큼의 애정이 없었던 것 아닐까. 태어난 인간뿐만 아니라 태어날 인간마저 사랑하려는 인문주의자는 권력의 씨앗을 늘 경계할 수밖에 없다. 라캉은 어쩔 수 없어서이든, 부주의해서든, ‘분석가-분석주체’라는 권력의 씨앗을 남겨놓았다. 종교, 국가, 자본이 그랬던 것처럼, 분석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 인간에게 예속될 수 있는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파기해야 하는가? 그 또한 아니다. 라캉이 그리도 강조했던 분석가의 ‘해석’을, 라캉에게 다시 돌려주면 된다. 라캉을,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라캉을 분석주체로 만들라! ‘분석가-분석주체’ 사이의 관계는 유의미하다. 내 등(무의식)의 상처는 스스로 치유할 수 없기에 그 상처를 치유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라캉을 분석주체로 돌려, '해석'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분석 : 분석가-분석주체’의 관계를 ‘사랑 : 사랑받는 이-사랑하는 이’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분석가가 분석을 통해 분석주체의 증상(강박증, 히스테리)을 어느 정도 치유할 수 있는 이유는, 분석주체가 분석가를 대타자(거부할 수 없는 타자)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분석가는 기꺼이 분석 주체의 대타자가 되어주려고 한다.(이것을 ‘전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다. ‘분석’의 논리는 ‘사랑’의 논리로 전환가능하다.


 ‘분석=사랑’이고, ‘분석가=사랑 받는 이’이고, ‘분석주체=사랑하는 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그 누군가는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사람(대타자)이 된다. 그때 그 거부할 수 없는 이(대타자=분석가=사랑받는 이)는 나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분석가가 (‘된다’가 아닌) ‘될 수’ 있다. 엄마가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주었을 때 모든 근심이 덜어지는 것처럼,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때 마음 속 깊은 곳의 차가운 얼음은 스르륵 녹아내릴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분석가’ 또한 탄생할 수 있다. 내 마음 속의 얼음이 녹으면 바로 내가 누군가의 ‘분석가’가 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분석주체)’가 사랑받으면 그 또한 ‘사랑받는 이(분석가)’가 되는 까닭이다. 그렇게 ‘분석의 논리’가 ‘사랑의 논리’로 ‘해석’될 때, ‘분석가-분석주체’라는 고정된 관계는 ‘사랑받는 이-사랑하는 이’라는 언제든 자리를 바꿀 수 있는 유동적 관계로 전환된다. 이렇게 ‘분석’의 논리가 ‘사랑’의 논리로 ‘해석’될 때 권력의 씨앗은 결코 잉태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할 때 충실한 '분석주체'가 되며, 사랑 받을 때 따뜻한 '분석가'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라캉을 재해석할 때, 라캉(정신분석학)은 진정한 인문주의자로 발돋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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