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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의 외로움

20대가 끝나가던 어느 즈음, 제게는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잘해주던 연인이 있었어요. 자신의 삶을 잘 돌보지 못할 만큼 제게 헌신적이었어요. 저는 부모에게도 받아보지 못했던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시간들 속에서 저는 외로웠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녀는 늘 자신의 어둠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녀는 자신의 어둠 때문에 늘 자신이 버림받으면 어쩌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것이 그녀가 제게 늘 헌신적이었던 이유였을 거예요. 버림받지 않으려고 늘 내게 잘해주려 했을 거예요.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눈치가 빨라요. 그래서 알고 있었어요.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나를 향한 헌신에 정작 나는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하지만 상관없었어요. 저는 그녀가 좋았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주고 싶었어요. 버림받지 않을 거라는 확신.    

  

 아마, 거기서부터 잘못되었을 거예요. 그녀를 ‘사랑’했어야 했는데, ‘연기’를 하게 되었으니까요. 나는 그녀를 ‘사랑’하기보다, 그녀가 버림받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늘 확인시켜주는 ‘확신증명기계’를 ‘연기’하고 있었어요. 돌아보면 저는 외로울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늘 혼자였으니까요. 그녀는 늘 자신의 어둠을 볼 뿐, 저를 본 적이 없었어요. 늘 불안하고 외로워했던 그녀는 자신의 불안과 외로움만을 보느라 외로움에 빠져드는 저를 보지 못했어요. 

     

 그녀가 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저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자신의 불안과 외로움, 그리고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을 거예요. 시간이 지나 깨달았어요. 모든 것을 저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던 그녀는 엄청난 나르시시스트였다는 것을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마저 자신 안으로 집어 삼키는 나르시시즘. 자신의 어둠만을 보는 나르시시스트는 필연적으로 그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외롭게 하죠.      


 '당신'을 보며 그때의 시간들이 생각나요. 늘 외로워하는 '당신' 곁에서 종종 외롭겠죠. 늘 자신을 보호하려는 '당신' 곁에서 종종 상처받겠죠. 저는 우리가 사이가 언제 삐걱댈지 알고 있어요. 제가 지쳤을 때일 거예요. 제가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삶의 무게가 버거울 때 우리 사이는 여지없이 삐걱거릴 테죠. 제가 지쳤을 때 '당신'의 불안, 외로움, 두려움을 충분히 껴안아주지 못할 테니까요. 

     

 '당신'을 만나며 언젠가부터 습관이 생겼어요. '당신'을 만나기 전 날에는 잠을 충분히 자요. 그게 여의치 않을 때는 만나기 직전에 짧게는 10분 많게는 30분 정도 눈을 감고 쉬어요. 그렇게 컨디션을 좋게 하려는 습관이 생겼어요. 우리 사이가 삐걱대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사랑하기 때문에 평온해지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평온해야지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당신'을 만나며 더 평온해지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제가 평온해져야 '당신'을 더 사랑해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외로워진 것이겠죠. 평온해지려 노력하기보다 불안, 외로움, 두려움에 자신을 내맡겨버리는 것이 '당신'의 오랜 습관이었으니까요. 사랑은, 함께 할 때 즐거움이 아니라, 함께 하지 않을 때 기다림과 간절함으로 표현되는 것이죠. 그러니 종종 제가 외로웠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거예요. 당신의 오랜 습관은 옅은 사랑을 말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저는 알고 있어요. 사랑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더 사랑해주는 일임을. 더 지치더라도, 더 외롭더라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당신'을 사랑하려 애를 쓸게요. 언제나 그랬듯,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게요. '당신'이 내게 처음와주었던 기적 같은 그 날을 잊지 않을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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