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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링' 혹은 '대화'로서의 가르침

훌륭한 선생은 잘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다.
가르쳐야 할 때와 가르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하는 선생이다.    


1.

복싱을 가르칠 때가 있다. (완전 초심자가 아니라면) 복싱은 '스파링'(유사 실전)으로 배울 수밖에 없다. 혼자 하는 복싱(기본자세·샌드백·쉐도우 등등)을 가르치는 것으로 복싱을 잘 하는 것처럼 배울 수는 있겠으나, 복싱 그 자체를 잘할 수는 없다. 복싱의 본질은 실전이기 때문이다. 복싱은 상대와 대치 속에서 발생하는 셀 수 없는 변수 속에서 싸우는 실전이다. 그래서 복싱은 스파링(유사 실전)을 통해서만 배울 수밖에 없다.


 스파링으로 상대를 가르칠 때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자가 상대를 이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르침으로서의 스파링은 상대를 찍어누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가상의 실전 상황을 만들어줌으로써 복싱(실전)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잘되지 않을 때가 있다. 복싱은 묘한 스포츠다. 룰이 있는 스포츠이지만 싸움에 매우 근접해 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때문에 스파링으로서의 가르침이 종종 실패하곤 한다.


 이 실패에는 이론적으로 두 경우가 있다. 우선은 가르치는 자가 수행이 덜 된 경우이다. 젊은 코치들이 종종 이런 실수를 한다. 가르침으로 스파링을 시작하지만 상대의 감정적이 주먹을 몇 대 맞으면 흥분해 상대를 찍어누르게 되는 경우다. 또 하나의 경우가 있다. 배우는 자가 과도하게 감정적인 경우다. 가르침으로 스파링을 시작했지만, 몇 대를 맞으면 흥분해서 싸움처럼 감정적으로 돌변하는 경우다. 욕을 하거나 심지어 발차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역시 가르침으로의 스파링은 수포로 돌아간다.


 나는 어떻게 스파링으로 가르쳤을까? 고백하건데, 나 역시 수행이 부족했다. 가르침으로 스파링을 한다는 건, 당연히 내가 상대보다 실력이 있고, 상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나는 상대를 다치게 한다거나 찍어누를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얼굴에 몇 대를 맞으면 십중팔구는 흥분한다. 이는 어느 정도 당연한 일이다. 일상생활에서 주먹으로 얼굴을 맞는 일은 매우 모욕적인 일이니까 말이다. 상대가 필요 이상의 감정적 주먹에도 맞대응하지 않고 강도를 조절해가며 스파링을 진행할 정도로 수행은 되어 있다.    


 대부분은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감정을 추스르고 배움으로서의 스파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자신의 감정을 끝끝내 추스르지 못하고 끝까지 진흙탕 싸움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바로 이때 나의 수행 부족이 드러났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주먹을 한 참을 맞다보니, 순간 나 역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서 상대를 다치게 헸던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를 몇 차례 겪으면서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괜한 짓을 했다는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2.

 철학을 가르칠 때가 있다. 철학은 '대화'로 배울 수밖에 없다. 혼자 책을 읽는 것으로 철학하는 체 할 수는 있겠지만, 철학 그 자체를 잘할 수는 없다. 철학의 본질은 삶의 변화(실전)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우글거리는 타자 속에서 발생하는 셀 수 없는 변수 속에서 매순간 자신의 삶을 확증해야 하는 실전이다. 그래서 철학(실전)은 타자와 진정한 대화(유사 실전)를 통해서만 배울 수밖에 없다.


 대화로 상대를 가르칠 때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자가 상대를 이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르침으로서의 대화는 상대를 찍어누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가상의 실전 상황을 만들어줌으로써 철학 그 자체를 알려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잘되지 않을 때가 있다. 철학은 묘한 학문이다. 앎을 배워야 하는 학문이지만 삶에 매우 근접해 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때문에 대화로서의 가르침이 종종 실패하곤 한다.


 여기에는 두 경우가 있다. 우선은 가르치는 자가 수행이 덜 된 경우이다. 젊은 선생들이 종종 이런 실수를 한다. 가르침으로 대화를 시작하지만 학생이 몇 번의 반론을 하면 흥분해 상대를 찍어누르게 되는 경우다. 또 하나의 경우가 있다. 배우는 자가 과도하게 감정적이 되는 경우다. 가르침으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몇 번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들으면 흥분해서 싸움처럼 감정적으로 돌변하는 경우다. 언성을 높이거나 빈정거리나 심지어 욕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역시 가르침으로의 대화는 수포로 돌아간다.

    

 왜 나는 ‘대화’로 철학을 가르쳐 왔을까? 상대에게 모욕을 주고 상대를 이기고 싶어서였을까. 나는 그 정도로 허접한 선생은 아니다. 만약 그럴 생각이었다면, ‘대화’ 말고 일방적 ‘수업’이 더 효과적이다. 일방적 ‘수업’은 상대를 묶어놓고 스파링하는 것이니 말이다. ‘대화’는 상대와 동등한 위치에서 가르치려는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용기 있는 혹은 피곤한 가르침의 방식이다. 바로 이 때문에 종종 배우려는 자의 무례함에 직면하게 된다. '대화'로 가르치려는 자에게 배우려는 자들 중 종종 자신의 시기심, 질투심, 피해의식 그로 인한 초점 없는 분노와 적개심 등등 자신 안에 정돈되지 않은 감정적 응어리들에 잠식 당한 이들이 있다. 이들은 가르침으로서의 ‘대화’를 진흙탕 싸움을 몰아가는 무례를 범한다.


 나는 어떻게 '대화'로 철학을 가르쳐야 할까? 적어도 가르침으로서 스파링의 실수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 상대가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으로 주먹을 휘둘러도 맞대응하지 않고 강도를 조절해가며 스파링을 해나가고 싶다. 혹여 끝끝내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진흙탕 싸움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그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조금 다치더라도, 그런 부끄러운 일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인문주의자의 가르침의 방식이다. 하지만 하나의 문제가 더 남는다.


 자신의 감정(시기, 질투, 피해의식, 분노, 적개심)에 잠식당해 상대에게 무례를 저지르는지도 모른 채로 무례를 저지르는 이들을 마냥 방치 할 것인가? 나를 위해서도 무례한 이를 위해서도 이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링 위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일이 링 아래로 내려오면 보이는 것처럼, 가르칠 때는 보이지 않는 않았던 것이 잠시 가르치는 일을 떠나 있는 시간이 되니 보인다. 멈추지 않고 진흙탕 싸움을 걸어오는 이들이 있다면 그때는 ‘스파링’이건 ‘대화’이건 가르침을 멈춰야 할 때다.


 “이제 그만 하시죠.” 조용히 말하고 글러브를 벗고 링을 내려왔던 것처럼, ‘대화’로서의 가르침 역시 그렇게 하면 될 일이다. 훌륭한 선생은 잘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다. 가르쳐야 할 때와 가르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하는 선생이다. 나는 그렇게 앞으로도 '스파링'으로 복싱을, '대화'로서 철학을 가르쳐 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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