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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출간]어쩌다 마주친 철학

신간 나왔습니다. 신간이 나올 때마다 반복하는 말이 있습니다.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닙니다. 산 책 중에서 읽는 겁니다.

많은 책을 읽고 싶다면, 일단 많은 책을 사야 합니다. 일단 사세요. 사놓으면 언젠가 읽게 됩니다. 


이번 책어렵습니다. 읽으라고 강요하는 폭력을 행사하고 싶지 않습니다. 

안읽어도 됩니다. 그냥 사기만 하세요.


이하 프롤로그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그의 직업적인 활동 이외의 부분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든지 지적인 활동을 한다. 즉 그는 ‘철학자’이며 예술가이고 멋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세계에 대한 특수한 구성에 참여하고 도덕적 행동에 대한 의식적 방침을 지켜낸다. 그는 세계에 대한 구상을 유지하거나 그것을 변용시킨다. 즉 새로운 사고방식을 창출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옥중수고』 안토니오 그람시


기쁜 마음으로, 다시 처음부터.

1.

“형님은 왜 거울 앞에서 계속 원투 연습하세요?” 체육관에서 한 회원이 의아한 듯 내게 물었습니다. 질문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챘습니다. 그는 제가 복싱을 오래했고, 꽤 잘해서 프로 시합도 뛰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신이 보기에 충분히 잘하는 것 같은데, 왜 거울 앞에서 초보처럼 땀을 뚝뚝 흘리며 기본자세를 연습하고 있는지 의아했을 테지요.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딱히 명료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얼버무렸습니다. “뭔가 조금씩 부족한 거 같아서요.” 얼마 뒤 어느 주짓수 관장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블루벨트는 주짓수 기술들의 조각들을 익히고, 퍼플은 그 기술의 조각들이 이어지는 다양한 연결고리들을 단단하게 만드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브라운 벨트는 자신의 색을 거의 완성하는 단계 같아요. 그리고 블랙벨트가 되면 다시 기본기부터 되짚어나가고요.”          


 그는 주짓수 띠 체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복싱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나는 왜 다시 기본기를 연습하고 있었을까? 복싱에는 띠 체계가 없습니다. 즉, 이는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줄 상징이 없다는 의미이지요. 그저 매순간 상대와 주먹을 섞으며 상대의 실력과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는 체육관의 위계적 구조를 만들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좋은 점이지만, 자신이 어디 즈음 왔는지 성찰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단점이기도 합니다.


 복싱 기술의 조각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의 다양한 연결고리도 몸에 익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익힌 것들은 어느 정도 나의 복싱 스타일(색)이 되었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뭔가 조금씩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해 뭔가 전부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미세한 움직임, 중심이동, 주먹과 팔의 각도, 호흡, 리듬이 조금씩 틀어져 전부 다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거울 앞에서 초보처럼 기본기를 연습하고 있었던 거죠. 


 띠가 없어서 몰랐지만, 저는 아마 복싱의 ‘검은 띠’가 되었던 것 아닐까요. 이것은 민망한 자화자찬만이 아닐 겁니다. '검은 띠'는 완성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하는 상태(1단!)이기 때문이지요. 검은 띠는 다시 기본부터 ‘되짚어나가는’ 시기라는 관장의 말은 조금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검은 띠는 다시 기본부터 ‘되짚어 나갈 수밖에 없는’ 시기라고. 검은 띠는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시기인 것은 아닐까요. 그러니 검은 띠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하나씩 되짚어 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저는 이제 겨우 복싱의 시작점에 올라 선 셈입니다.


2.

 저의 철학은 복싱과 닮아 있습니다. 저는 어디에 소속되어 철학을 공부해본 적이 없습니다. 학교도 없고, 선배도 없고, 지도 교수도 없고, 논문 심사를 받은 적도 없지요. 그러니 저의 철학도 복싱처럼 띠가 없는 셈입니다. 나의 철학적 역량이 어디 즈음 왔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긴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의 철학적 앎이 어디까지 왔는지 언제나 불투명했고 모호했습니다. 그저 어느 철학자의 글을 읽고, 나의 글을 쓰며, 또 그것을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순간마다 나의 철학적 역량을 가늠해볼 수밖에 없었지요. 마치 매번 스파링으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볼 수밖에 없는 복싱처럼 말이지요.      


 어느 철학자의 글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혹은 이해된다면 “이것이 내 수준이구나.” 내가 알고 있는 철학을 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거나 혹은 있다면 “이것이 내 수준이구나.” 그것이 더 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나의 철학의 위치라고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렇게 제가 어디 즈음에 있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철학을 향한 아슬아슬한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어왔던 셈이지요. 아슬아슬하지만 그 길을 잘 걸어오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그리 순탄하기만할까요?  

   

 어느 날 이었습니다. ‘형이상학이 뭐지?’ 한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형이상학. 형이상학. 얼마나 많이 떠들었던 이야기였을까요. “서양철학의 시작은 탈레스이고, 탈레스가 형이상학을 기초 세웠다. 하여 서양철학은 형이상학으로부터 시작된다.”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철학적 개념들이 다 낯설게 보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고 조금 더 지나 혼란스러웠지요. 진지하게 철학을 공부해왔다고 자부해왔습니다. 그런데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으니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철학을 공부하며 복싱을 해서 얼마나 다행인가요. 저의 당황과 혼란이 내 삶에 어떤 의미였는지 너무 늦지 않게 알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아마 저는 철학의 ‘검은 띠’ 어디 즈음 와 있었던 걸 겁니다. 이것 역시 민망한 자화자찬은 아닐 겁니다. 저는 철학의 기본으로 돌아가려는 게 아니라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분명히 안다고 여겼던 모든 것이 모두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어느 날 철학 앞에서 느꼈던 당황과 혼란은 결코 슬픔을 느껴야 했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사건이지요. 그 당황과 혼란은 좌충우돌하며 철학을 공부했지만, 나름 그 길을 잘 걸어왔다는 반증이었으니까요. 그 좌충우돌의 길 끝에서 드디어 다시 기본(1단!)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철학에 띠가 있다면, 아마 저는 이제 겨우 ‘검은 띠’(1단!)가 된 셈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기쁜 마음으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좌충우돌하며 이런 저런 철학을 공부했던 긴 시간을 돌아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이 책은 서양 철학의 시작인 고대와 중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책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은 이유입니다. 거울 앞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다시 ‘원투’를 연습하는 마음으로 다시 철학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께 닿은 이 책은 여러분들을 위한 책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좌충우돌했던 어느 근본 없는 철학자가 철학의 기본으로 돌아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세월이 지난 제 삶을 돌아보았을 때, 철학과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 일 겁니다. 기쁜 마음으로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 또 어디 있을까요. 기쁜 마음으로, 다시 처음부터.


2021년 12월 2일

기쁜 마음으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려는, 황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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