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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스케이트

어머니에게 사랑받은 기억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아주 선명하게 기억나는 사랑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니 방에 가봐라.” 집으로 돌아온 내게 어머니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내 방 책상 위에는 검은 색 박스가 하나 올려져있었다. 롤러 스케이트였다. 방문 뒤에 서 있는 어머니는 나의 반응을 보고 당황한 듯 황급히 안 방으로 가셨다. 어머니는 개구쟁이였던 내가 기뻐서 날 뛰는 표정을 기대했었나보다. 하지만 나는 울컥 눈물이 터져버렸다. 박스를 뜯고 롤러스케이트 꺼내 한 번 신어보지도 못하고 아이처럼 울어 버렸다.     


 시간이 지나 그 눈물의 의미를 안다. 그건 깊은 사랑을 받은 마음의 표현이었다. 나는 왜 그때 눈물을 흘릴 만큼 사랑받았다고 느꼈을까? 너무나 간절히 원했던 선물을 받게 되어서?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해본 적이 별로 없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상황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삶에 하나의 빛과 어둠을 주었다. 일찍 자립적인 삶을 살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나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에 서툴다. 

    

 사랑은 어렵다. 왜 그런가?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롤러스케이트는 사랑이었다. 나는 언감생심 어머니에게 그것을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런 요구들은 언제나 묵살이나 꾸중의 대상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 어머니는 말하지 않았던 내 마음을 어찌 알고 롤러스케이트를 사다주었다. 롤러스케이트를 받아서 눈물이 났던 것이 아니다. 말하지 않았던 내 마음을 누군가 알아주었기 때문에 눈물이 났던 것이다. 사랑이 왜 귀하고 드문 일인지도 알겠다.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주는 일은 그리도 귀하고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상처 속에서 자라는 꽃이다.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 또 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는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 챌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누군가를 사랑해 줄 수 없다. 그때 우리는 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하지 않는 나의 마음을 누군가 알아채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할 때 우리는 상처 받게 된다. 사랑은 상처 속에서 자라는 꽃이지만, 그 상처가 지속될 때 꽃은 채 피지 못하고 꺾여버린다. 사랑은 상처 속에서 자라지만, 동시에 상처 때문에 꺾여 버리기도 하는 꽃이다. 


 '너'의 꽃은 자라고 있는 중일까? 이미 꺾여 버린 것일까? '나'의 꽃은 자라고 있는 중일까? 이미 꺾여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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