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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삶의 안목에 관하여

맞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했던 날

맞으면 자존심이 상한다.

프로복서를 준비하면서 열심히 했다. 그래서였는지 나름 기본기도 잡히고, 링에서 긴장해서 몸이 경직되는 일도 많이 줄었다. 또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메써드가 되었건 스파링이 되었던 실전 연습을 많이 하려고 했다. 그런데 복싱에 익숙해져가면서 조금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처음 복싱을 시작할 때, 가장 큰 문제가 상대와 마주서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면,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는 자존심이 문제였다.


 예전에는 스파링을 하면서 맞을 때는 ‘맞으면 아프지 않을까? 다치지는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앞섰다면, 언젠가 부터는 ‘이 정도 실력 밖에 안 되는 애한테 맞고 있어야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파링에서 몇 대 맞으면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자존심이 상할 때는 어김없이 거리조절이나 기술은 뒷전이고 마치 동네 싸움처럼 치고받는 격렬한 스파링이 되곤 했다. 링에 오르는 복서들 중 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고, 그러니 맞아서 자존심 상하지 않는 복서도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맞으면 자존심이 상했다.



작년 신인왕 준우승과 스파링

내가 다닌 체육관에는 작년 프로 복싱 신인왕전 준우승을 한 프로복서가 있다. 나와는 15살 차이가 나는 아이다. 그 아이는 중학교 때부터 복싱을 시작해 대학교 복싱부에서 선수생활을 하다 프로 복싱으로 전향했다. 체력, 기본기, 기술까지, 4라운드 선수 같지 않은 선수다. (프로 복서는 링 경력에 따라 일반적으로 4라운드 선수, 6라운드 선수, 10라운드 선수로 나누곤 한다. 챔피언 급이 되면 12라운드 선수가 된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선수였다. 신인왕전 준우승도 아슬아슬한 준우승이었다.


 당연히 나와 스파링을 할 기회는 없었다. 실력 차가 너무 많이 나서 서로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관장이 “형님, 오늘은 기수랑 한번 하시죠?”라고 말했다. 그 아이와 가벼운 스파링을 한 번 해보라는 이야기였다. 실력 차야 분명했지만, 걱정보단 기대가 많았다. 실제 프로 시합에서 내 실력이 어느 정도 통할지 가늠해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보호 장구를 착용하고 링에 섰다.



맞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했던 날


가볍게 시작한 스파링이 점점 격렬해졌다. 그 아이의 여유 있는 표정은 사라졌고 집중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실력 차를 떠나 체중도 내가 많이 나가기도 했고, 한방 제대로 맞으면 누구든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심 ‘그래 너도 별거 아니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경쾌한 스탭을 살려 뒤로 빠지면 계속 잽을 적중시켰다. 그럴수록 나는 더 자존심이 상했고, 더 격렬하게 밀어붙이며 펀치를 날렸다.

      

 그렇게 밀어붙이면서 드디어 상대를 코너에 몰았다. 이제 더 이상 스탭을 살리면서 뒤로 물러날 공간은 없었다. 자존심도 상하겠다, 몸에 힘도 들어갔겠다, 한방에 제대로 먹여보자는 심정으로 크게 뒷손 날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아이는 내 펀치 타이밍을 읽고 위빙(상체를 움직여 상대의 공격을 회피하는 기술)을 하며 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헉’했다. 큰 펀치를 내느라 옆구리가 비었는데 그곳을 노리기 딱 좋은 공간으로 순식간에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디 공격을 하지 않았다. 타이밍을 놓쳤다보다 싶어, 본능적으로 반대 손으로 크게 펀치를 날렸다. 그와 동시에 그 아이는 반대로 위빙을 하며 다시 반대 쪽 옆구리를 쪽으로 파고들었다. 이번에도 ‘헉’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타이밍에, 그 위치면 100% 바디 공격이 날라 온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아이는 위치만 선점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그 아이는 애초부터 공격할 생각이 없었던 거였다. 한 라운드가 더 남아 있었지만, ‘그만하자’고 말한 뒤 헤드기어를 벗었다.


 그날 기묘한 경험을 했다. 보통은 스파링을 하면 맞아서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그날은 맞지 않아서 더 자존심이 상했다. 분명 맞아야만 했을 타이밍, 위치였는데 맞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아이가 때리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알고 있다. 실력 차가 많이 나는 상대를 굳이 때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을 테고, 또 형이라고 부르기가 어려울 정도로 나이차가 많은 형을 굳이 패고 싶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더 자존심이 상했다. 아직도 내 실력이 제대로 된 스파링조차 하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실망감 때문에.


  

삶의 안목에 관하여

그 아이의 이름은 ‘기수’다. 운동을 끝내고 기수와 커피를 한잔 마시면 이야기를 나눴다. 


“너 어제 바디 때릴 수 있는데 안 때렸지?”
“네”
“(웃으며) 이 새끼, 너 나 무시하는 거냐?”
“아뇨, 굳이 때릴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요.”
“나는 아직 멀었나 보다. 이래서 데뷔전 치르겠냐?”
“아니에요. 이건 형님 기분 좋으라고 말하는 건 아닌데요. 다른 체육관 가서 프로 준비하는 애들이랑 스파링 하잖아요. 그럼 가끔 실력 차가 너무 나면 어제처럼 타이밍하고 위치만 잡고 안 때릴 때가 있어요. 그런데 걔들은 제가 위치하고 타이밍만 잡고 나갔다는 걸 몰라요. 지가 잘해서 안 맞은 줄 알아요. 근데 어제 형님은 그거 아셨잖아요? 전 그게 놀랍던데요. 데뷔전도 안했는데 그걸 알기가 사실 쉽지 않거든요.”     

 

 그날 기수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나이 많은 형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 기분 좋음이 기수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예전에는 맞으면 맞고 때리면 때리는 걸로 끝이었다. 복싱에 조금 더 익숙해진 뒤에는 맞으면 자존심 상하고, 때리면 실력이 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어제는 맞지 않아도 자존심이 상했다. 왜 일까? 그건 나름 복싱에 관한 안목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안목이 없었다면, 상대가 뭘 했든 안 맞았다는 사실 때문에 싱글벙글하고 있었을 게다.



내가 뭘 모르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안목이다.

롤러코스터 같은 며칠이었다. 안 맞았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 씩씩거리고 있다가, 금세 자존심이 상했던 것도 안목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뿌듯해져버렸으니까. 그 조울증 같은 롤러코스터에서 내리고 난 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생각났다. “너 자신을 알라!”는 이야기는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자신에 대해서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알아야 하는 존재이지, 자신이 알아야 할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은 분명 드물다. 


 그런데 왜 소크라테스 같은 탁월했던 철학자가 “너 자신을 알라!”는 당연한 그래서 식상해 보이기까지 한 이야기를 했을까? 인간은 대체로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모르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서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어서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너 자신을 알라!”는 이야기를 한 것일 테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네가 알아야 할 것은 네가 무엇을 모르는지에 관한 것이다”라는 역설적인 이야기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안목이란 뭔가? ‘어떤 것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안목이다. 그렇다면 삶의 안목은 내가 아는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다. 진짜 안목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그래야만 삶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배려해주지 않았다면, 얻어 터져 벌써 쓰러졌어야 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 주먹만 휘두르는 예비 복서들의 안목은 얼마나 협소한가. 물론 나의 복싱에 관한 안목이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렇게 주제넘은 사람은 아니다.


 복싱을 하면서 안목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새삼 느낀다. 맞지 않고도 자존심이 상하는 게 안목이다. 내가 무엇을 모르고 무엇이 부족한지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안 맞고도 자존심이 상할 수 있다. 결국 안목이란 건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파악하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서 알게 될 때,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안목이다. 굳이 복싱이 아니라도 삶의 안목도 마찬가지다.



협소한 안목을 가진 이들에게

삶의 안목이 협소한 이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던가? 한국 재벌들의 안목을 생각해보자. 임금을 올려주면 그것이 다시 자기네들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걸 모르는 한국 재벌들의 안목은 얼마나 협소한가. 자기네 알고 있는 돈 버는 방법, 그러니까 노동자를 쥐어짜야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만을 아는 재벌들의 안목은 협소하고 천박하기까지 하다.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재벌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한국 정치인들의 안목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국민들이 원하는 정치를 해주면 자기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한국 정치꾼들의 안목은 얼마나 협소한가. 자기네가 알고 있는 권력을 얻는 방법, 그러니까 국민들 사이에 편을 가르고 지역감정을 부추겨서 금뺏지를 다는 방법만 아는 정치꾼들의 안목은 얼마나 협소하고 몰염치한가.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정치꾼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무엇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무엇을’은 단연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여야 한다. 안목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결코 넓어지거나 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안목이 깊어지기를 바라는 만큼, 맞지 않고도 자존심 상할 수 있는 예비 복서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또한 재력을 다 잃기 전에 임금을 올려줄 수 있는 재벌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금뺏지 뺏기고 초라해지기 전에 국민들이 원하는 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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