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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는 피해의식

피해의식의 자연적 차이, 부모


“너 요즘 살 찐 거 아니야?” ‘광호’과 ‘강준’ 두 사람이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해보자. ‘광호’는  그 말이 유쾌하진 않지만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길 수 있다, 반면 ‘강준’은 그 말에 감정적 동요 때문에 과민 반응하게 된다. 이는 피해의식의 밀도 차이다. 이처럼 피해의식이 덜한 이들이 있고, 피해의식이 더한 이들이 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늘 것일까? 이 차이는 결과적일 수 있고, 자연적일 수도 있다.


 결과적 차이는 무엇일까? ‘광호’와 ‘강준’ 두 사람에게 같은 밀도의 피해의식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피해의식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인해서 피해의식의 밀도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즉, ‘강준’보다 ‘광호’가 자신의 피해의식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피해의식이 덜 해질 수 있다. 하지만 피해의식의 밀도에는 그런 결과적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 차이도 있다. 즉 피해의식을 극복하려는 의도적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이 짙은 이들이 있고, 옅은 이들이 있다.


 그 자연적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그 차이를 발생시킨 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부모’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의 무의식에는 ‘부모’라는 항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호’와 ‘강준’은 뚱뚱하다고 놀림 받은 일들은 비슷하게 있었다. 또 ‘광호’와 ‘강준’ 둘 모두 딱히 자신의 피해의식에 대해 고민하거나 성찰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강준’보다 ‘광호’가 피해의식이 옅은 것일까? 부모 때문이다.



'부모'라는 무의식


 “또 먹어? 살 좀 빼!” ‘강준’ 부모의 입버릇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강준’의 부모는 ‘강준’의 외모를 긍정해주지 못했다. 반면 ‘광호’의 부모는 달랐다. ‘광호’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대신 ‘광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따뜻하게 ‘광호’를 안아주었다. 피해의식의 자연적 차이는 ‘부모’로부터 온다. 부모에게 존재 자체로 사랑(긍정)받았던 아이는 피해의식이 옅을 수밖에 없다. 반면 부모에게 존재 자체로 충분히 사랑(긍정)받지 못했던 아이는 피해의식이 짙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부모’는 반드시 생물학적 부모일 필요는 없다. 한 아이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이면 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대타자’라고 한다.) 


 ‘부모’의 중요성은 다른 피해의식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나는 늘 억울하게 비난(오해)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 옆에서 수군거리면 모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분명 어린 시절, 자신에 관한 근거 없는 비난‧오해(상처) 때문에 발생한 피해의식이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이런 억울한 비난‧오해를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피해의식이 더하고 누군가는 덜하다. 이 역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부모’라는 원인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깊은 사랑을 받은 이들이 억울한 비난‧오해(상처)를 비교적 쉽게 넘어갈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근거 없이 비난하고 오해하더라도, 부모만은 자신을 온전히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은 상대적으로 피해의식이 옅을 수밖에 없다. 반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거나 혹은 조건부 사랑을 받았던 이들은 억울한 비난과 오해를 쉬이 견딜 수 없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인 부모마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믿는 아이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의 피해의식(상처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는 짙어질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에서 ‘부모’의 역할은 중대하다.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고, 한 인간의 무의식에서 ‘부모’라는 항은 절대적이라 할 만큼 크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한 아이가 옆 집 아줌마에게, 동네 친구에게 사랑(긍정)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랑(긍정)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결코 ‘부모’의 그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아이에게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무의식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부모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이며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피해의식을 고찰하는 데 부모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이며,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것인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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