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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 ‘권력-욕망-금기-의무’의 사면체

피해의식, ‘권력-욕망-금기-의무’의 사면체 

피해의식은 ‘욕망-금기-의무’라는 삼각형 구도 안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 삼각형을 완성시키는 힘은 무엇인가? 바로 ‘권력’이다. 특정한 ‘권력’(부모)이 ‘욕망’(놀고 싶다)을 ‘금기’(놀지 마)하는 과정에서 ‘의무’(공부 해야만 해)를 만들어낸다. 사회적 ‘권력’이 개인들의 ‘욕망’을 금지하고, 이를 통해 특정한 ‘의무’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촉발되는 내적 논리다. 이 논리는 다른 피해의식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일에 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일이라면 쳐다보고 싶지 않고, 항상 자신만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일과 관련해서 과도하게 자신을 방어하려고 한다. 이런 피해의식은 왜 생겼을까? 특정한 ‘권력’(사장)이 ‘욕망’(쉬고 싶다)을 ‘금기’(쉬지 마)하는 과정에서 ‘의무’(일 해야만 해)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일에 대한 피해의식이 촉발된다. 이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의식을 도형화할 수 있다.      


 피해의식은 사면체(삼각뿔)의 형상을 띤다. ‘권력’을 꼭짓점으로 바닥의 ‘욕망-금기-의무’라는 삼각형의 세 점을 이은 사면체. 사면체는 4개의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면체는 바닥의 삼각형과 나머지 세면이 삼각형으로 둘러싸여 있다. 즉, 피해의식이 ‘꼭짓점(권력)-삼각형(욕망-금기-의무)’의 사면체라면, 피해의식에는 3면의 삼각형이 더 존재하게 된다. ‘권력-의무-욕망’의 삼각형, ‘권력-금지-욕망’의 삼각형, ‘권력-금지-의무’의 삼각형이다. 이 3개의 삼각형을 통해 피해의식이 우리네 내면을 어떻게 왜곡시켜 가는지를 알 수 있다.

      


‘권력-의무-욕망’의 삼각형

   

 ‘권력-의무-욕망’의 삼각형부터 살펴보자. ‘권력’(부모)은 ‘의무’(공부)를 ‘욕망’화한다. 마음껏 뛰어 놀고 싶은 아이가 있다. 하지만 부모는 ‘공부해야 해’라는 의무를 강하게 반복했다고 해보자. 그때 그 아이의 내면은 어떻게 될까? ‘의무’를 ‘욕망’하게 된다. 쉽게 말해, 자신이 원하는 것(노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부모)이 지정한 ‘의무’(공부)를 ‘욕망’하게 된다. “제가 하고 싶어서 공부하는 거예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잿빛 표정이 된 아이들의 흔한 말이 이를 방증하지 않는가. 이는 아직 미숙한 아이들의 마음 상태이기만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권력’이 ‘의무’를 ‘욕망’화하는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쉬고 싶은 직장인이 있다고 해보자. 이때 자본(권력)은 ‘돈을 벌어야 해’라는 의무를 강하게 반복한다. 그 직장인의 내면은 어떻게 될까? ‘의무’를 ‘욕망’하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쉬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본)이 지정한 의무(일)을 욕망하게 된다. “제가 하고 싶어서 일하는 거예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잿빛 표정이 된 직장인들의 흔한 말이지 않은가. 이것이 ‘권력’(부모‧자본)을 통한 ‘의무’(공부‧일)의 ‘욕망’화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이렇게 피해의식은 우리의 마음을 뒤틀리게 만든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우리의 내면을 왜곡하는 방식이다.



‘권력-금지-욕망’과 ‘권력-금지-의무’의 삼각형


 ‘권력-금지-욕망’의 삼각형을 살펴보자. 이는 어떻게 우리의 내면을 왜곡하는 걸까? ‘권력’은 ‘금지’를 ‘욕망’화한다. 다시 아이와 직장인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부모(권력)는 아이에게 노는 것을 강력하게 금지한다. 이 금지가 반복되면 아이의 내면은 어떻게 될까? ‘금지’(놀지 마)를 ‘욕망’하게 된다. 시험을 끝내고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가도 아이는 마음이 편치 않다. 그 아이는 놀지 않는 것(금지)을 욕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직장인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권력)은 직장인에게 쉬는 것을 강력하게 금지한다. 그 금지가 반복되면, 직장인은 금지(쉬지 마)를 욕망하게 된다. 몸과 마음이 혹사당할 정도로 일에 치여 잠시 휴직 중인 직장인은 마음이 편치 않다. 그 직장인은 쉬지 않는 것(금지)을 욕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권력-금지-의무’의 삼각형 역시 이와 유사한 논리로 우리의 내면을 뒤튼다. ‘권력’은 ‘금지’를 ‘의무’화한다. ‘권력’은 무엇인가를 ‘금지’함으로써 그것을 ‘의무’화한다. 부모와 자본이라는 권력이 이를 잘 보여준다. 부모는 노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그 금지를 의무화한다. 노는 것을 항상 ‘금지’ 당해왔던 아이는 나이가 들어서도 마음 편히 놀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금지’(놀지 않는 것)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의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자본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은 쉬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그 금지를 의무화한다. 쉬는 것을 금지 당해왔던 직장인은 회사를 그만둬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금지’(쉬지 않는 것)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피해의식은 우리의 내면을 왜곡한다.



 피해의식은 ‘권력-삼각형(욕망-금기-의무)’의 사면체다. 이때 바닥의 삼각형(욕망-금기-의무)이 피해의식 자체를 촉발시키는 동력이다. 그리고 나머지 세 면의 삼각형(‘권력-의무-욕망’/‘권력-금지-욕망’/‘권력-금지-의무’)은 우리네 내면을 왜곡시키는 동력이다.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니다. 피해의식은 왜 생기는가? 하고 싶었지만(욕망) 할 수 없었던(금지) 일 때문에 발생한다. 또 하고 싶지 않았지만(욕망) 해야만 했던(금지) 일에서 발생한다. 이 욕망과 금지의 뒤엉킴 사이에서 피해의식이 발생하고, 그 피해의식이 우리네 내면을 왜곡하게 된다. 피해의식은 지극히 개인적 문제다. 하지만 어떤 피해의식이든, 권력이라는 꼭짓점으로부터 촉발되기 때문에 지극히 사회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일은 중요하다. 왜 그런가?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에 따라 사는 것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욕망하고, 자신이 결코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금지하는 자연스러운 마음. 이 자연스러운 마음을 따라 살아갈 때 행복하다. 바로 이것이 많은 이들이 불행한 이유 아닌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게 된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이런 삶은 필연적으로 불행하다. 바로 이 불행의 근원에 피해의식이 있다. 그러니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것은 바로 긴 시간 우리를 속박하고 있던 불행의 사슬을 끊어내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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