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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적 사랑

사랑은 '감정'이라 아니라 '감응'이다. 
'감정'은 '나'를 보는 일이고, '감응'은 '너'를 보는 일이다. 


사랑은 파시즘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때로 사랑은 파시즘적이 되곤 한다. 파시즘이 무엇인가? 어려울 것 없다. 한 사람이 갖고있는 다양한 면들 중 하나만을 보는 것이다. 나치는 어떻게 유대인들을 학살할 수 있었을까? 질문에 이미 답이 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학살할 수 있었다. 제빵사이며, 슈베르트를 좋아하며,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강아지를 키우고, 저녁에는 산책을 하는 한 사람에게서, 다른 모든 면을 제거하고 유대인이라는 사실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적과 동지로 구분해서 적을 참혹하게 살육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은 파시즘에서 가장 멀리 있다. 사랑은 한 사람의 다양한 면을 모두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냥 사랑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면 파시즘적 태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이미 파시즘적 사랑이다. 우리의 사랑(이라고 믿는 감정)을 아프게 돌아보라.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는가? 흔한 욕정을 사랑이라고 포장한다. 이렇게 포장된 사랑은 파시즘적이다. 그 사랑은 한 사람의 여러 면을 보지 못하고 여자(혹은 남자)의 생식기만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는가? 경제적 안정을 사랑이라고 포장한다. 이렇게 포장된 사랑은 파시즘적이다. 그 사랑은 한 사람의 여러 면을 보지 못하고 한 사람의 경제적 능력만을 보는 일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는가? 자신의 외로움(홀로 있지 못함)을 채워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포장한다. 그것 역시 파시즘적 사랑이다. 그 사랑은 한 사람의 여러 면을 보지 못하고 나의 외로움을 채워주는 모습만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 아니 섣불리 누군가를 사랑할 수가 없다. 한 사람의 여러 면을 보게 될 때 사랑을 주저하게 되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아내이고, 고되게 밥벌이를 하는 생활인이며, 유재하를 좋아하고, 에곤 쉴레를 좋아하며, 들뢰즈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그 모든 면을 볼 때 우리는 섣불리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자 아내인, 고된 삶을 살아가는, 유재하와 에곤 쉴레와 들뢰즈를 좋아하는 그녀를 정말로 소중하게 대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 쉽게 사랑하게 되는가? 한 사람의 그 모든 면을 제거하고, ‘생식기’ 혹은 ‘경제력 능력’, ‘외로움의 완화제’만을 볼 때만 성급하게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사랑이라면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의 자기애일 뿐이다. 성급한 사랑은, 파시즘적 사랑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파시즘이 그렇듯, 파시즘적 사랑 역시 '나'와 '너'와 '우리'를 모두 파괴할 수밖에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파시즘적 사랑은, ‘나’와 ‘너’와 ‘우리’와 섬세하게 '감응'하는 일이 아니라. ‘나’와 ‘너’와 ‘우리’를 모두 파괴하는 혼란스럽고 통제되지 않는 ‘감정’에 휩싸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갖고있는 다양한 면을 볼 수 있을 때,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는 감정 앞에서 자꾸만 주저하게 된다. 자신이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할 수 있을지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많은 모습들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지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짜 사랑하려는 자는 사랑하지 않는 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자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감응’한다. '감정'은 '나'를 보는 일이고, '감응'은 '너'를 보는 일이다. 사랑하려는 자는 사랑하기 전에 물어야 한다. 나는 얼마나 '감정'으로부터 멀어졌는가? 나는 얼마나 '감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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