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관계' 아니다.

소풍이 좋았다. 보물찾기가 있었으니까. 찾는 과정의 설렘, 발견했을 때의 희열이 좋았다. 철학은 보물찾기다. 어느 철학자가 숨겨둔 보물을 찾는 과정은 설렌다. 그리고 그 보물을 찾았을 때 희열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다. 보물을 찾았다.


사랑은 관계라는 잘못된 가정 아래서만 실패한다. 사랑은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진리의 생산이다. 무엇에 대한 진리일까? 상황 속에서 단지 하나만이 아니라 둘이 작용하는 것에 대한 진리가 그것이다. 『조건들』 알랭 바디우


사랑은 언제 실패하는가? 사랑이 관계라는 믿음 때문에 실패한다. ‘나’와 ‘너’와의 관계. 그 관계가 바로 사랑이라고 믿을 때 사랑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사랑은 무엇인가? 진리의 생산이다. 진리는 무엇인가? 기쁨이다. 이제 바디우의 말을 다시 읽어보자.


사랑은 기쁨의 생산이다. 무엇에 대한 기쁨일까? 상황 속에서 단지 하나만이 아니라 둘이 작용하는 것에 대한 기쁨이 그것이다.


바디우는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하나’도 아니고 ‘셋’도 아닌 ‘둘’ 하지만 사랑은 그 ‘둘’의 ‘경험’이지 ‘관계’는 아니다. ‘관계’는 ‘경험’을 위한 토대일 뿐, ‘관계’가 곧 ‘경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와 ‘너’가 ‘관계’ 맺지만 관계 이외에는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하거나 혹은 ‘하나’ 혹은 ‘셋’의 ‘경험’을 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던가.


둘의 관계는 닫힌 관계이고, 둘의 경험은 열린 관계이다.


‘나’와 ‘너’의 관계 그 자체가 사랑이라고 가정할 때, 사랑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실패한 사랑은 무엇인가? 거래는 사랑이 아니다. 의존은 사랑이 아니다. 섹스는 사랑이 아니다. 불륜은 사랑이 아니다. 거래를, 의존을, 섹스를, 불륜을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와 ‘너’의 관계 자체를 사랑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사랑이라고 가정할 때 사랑은 반드시 실패한다.


사랑은 ‘관계’ 너머 있다. ‘경험’이다. 어떤 경험인가? 진리(기쁨)의 생산의 경험이다. 어떤 진리인가? ‘나’(하나)만이 아니라 ‘나와 너’(둘)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에 대한 진리(기쁨)이다. 둘이 작용하는 것에 대한 기쁨. 진정한 기쁨. '나'와 '너'가 ‘관계’해서 기쁜 것이 아니라 '나'와 '너'가 작용해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의 기쁨. 그 진정한 기쁨을 생산하는 일이 바로 사랑이다. 관계 이외에 얻을 수 있는 기쁨의 경험이 없다면, 그 관계는 사랑에 실패한다.


둘의 관계는 닫힌 관계이고, 둘의 경험은 열린 관계이다.


거래와 의존은 사랑일 수 없다. 거래와 의존은 관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섹스는 사랑이 아니다. 섹스는 ‘나’와 ‘너’가 ‘관계’해서 기쁜 것이기 때문이다. 불륜은 사랑이 아니다. ‘관계’에서 도피해서 도달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거래, 의존, 섹스, 불륜은 모두 관계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 관계에 중심에 두고 있다. 그래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관계가 아니니까.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나’와 ‘너’가 함께 작용해서 진리에 이르는 '경험'의 과정. '관계' 너머 '경험'으로 가는 과정. 사랑은 엔지니어들만이 할 수 있다. 세계를 만들어 가는 엔지니어들. 더 이상 사랑에 실패해서는 안 된다. ‘관계’를 너머서 ‘진리(기쁨)의 생산’을 경험할 수 있기를. ‘너’와 함께하는 관계를 넘어 ‘너’와 함께 진리의 생산을 경험할 수 있기를. 그런 ‘나’가 되기를, 그런 ‘너’를 만날 수 있기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기를. 그렇게 둘의 경험으로 무한히 열린 관계를 다시 경험할 수 있기를.


“이 거리의 이름은 아샤 라시스 가街

이 길을 저자 안에서

엔지니어로서

개척한 사람의 이름을 기리며“ 『일방통행로』 발터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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