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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최선을 다했어?'라는 폭력적인 말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살아왔던 걸까?

“형님, 빽(샌드백) 그렇게 칠거면 안 치는 게 나아요.”

일반 회원으로 1여년을 운동하다 프로 데뷔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운동 강도도 높아졌고, 감량도 해야 했고, 여기저기 부상도 많았다. 순간순간 ‘내가 이걸 왜 하려는 거지?’라는 회의감이 밀려들곤 했다. 그러다보니 훈련하는 중간 중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펀치 한 번을 내도 집중해서 움직이기보다 그저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훈련을 하곤 했다. 관장이 그걸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관장의 선수 지도방법 중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샌드백 치기다. ‘적어도 샌드백 칠 때만큼 진짜 시합이라 생각하고 집중해서 모든 힘을 쏟아서 3분을 채워야 한다!’고 선수들에게 입이 닳도록 말한다.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건지, 운동이 하기 싫었던 건지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는 않지만 시간 때우듯이 샌드백을 두들기고 있을 때였다. 관장은 그런 나를 한 동안 바라보더니 다가와 말했다. “형님, 빽(샌드백) 그렇게 칠거면 안 치는 게 나아요.”    

  

 순간 뭔가 크게 잘못한 거 같은 기분이 들어 남은 시간동안은 죽을힘을 다해 샌드백을 두들겼다. 운동이 끝날 때 즈음 관장은 링에 걸터앉아 있는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저는 형님이 최선을 다하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아까 화를 냈던 건 형님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그랬어요.”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사람이 대충 시간 때우듯 운동한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 마디를 했지만, 사람 좋은 관장인지라 그 한 마디가 못내 마음에 걸려서 옆에 앉아 달래듯 이런저런 이야기했던 게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걸까?

체육관에 프로 선수가 둘 더 있다. 관장은 그 둘이 훈련하는 것이 마뜩치 않을 때는 따끔하게 한 마디씩 한다. 그렇게 한 마디를 하고나서 덧붙이는 말이 있다. “네가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라는 말이다. 그 말에 선수들은 기가 팍 죽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스스로를 다그치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관장의 ‘최선을 다했냐?’는 말에 자학하기 시작했다. ‘난 나태하고 게을렀어. 더 열심히 해야 해!’라고 되뇌며 자신을 다그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인가 찜찜해졌다. 오랜 시간 간절히 바랐던 꿈을 이루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부정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콤플렉스 같은 꿈을 이뤄 나를 긍정하고 싶어서 복싱을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늘 최선을 다하지 않는 나태하고 게으른 놈이었어!’라는 부정적 인식이 커져가고 있었다. 찜찜함의 정체를 고민하면서 알게 되었다. ‘최선을 다했냐?’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지 말이다.


 객관적으로 내 삶을 돌아봤다. 나는 프로복서라는 꿈을 이루고 싶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복싱에만 전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글쟁이니 써야하는 글도 있고, 가장이니 이런 저런 일을 하며 돈도 벌어야 하고, 아이 둘도 돌보아야 한다. 그게 부정할 수 없는 내 삶의 조건이다. 그 와중에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체육관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최선을 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름 할 수 있는 것들을 피하지 않고 살고 있었던 셈이다.



‘최선을 다했어?’라는 폭력적인 말


‘최선을 다했냐?’라는 말은 일정 정도 폭력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최선을 다했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부모로부터, 선생으로부터, 대대장으로부터, 상사로부터, 사장으로부터 정말 끊임없이 들었다. 차라리 윽박지르고 화를 내면 반항이라도 할 텐데, “네가 정말 최선을 다했는지 한 번 곰곰이 생각해봐”라는 그네들의 타이르는 듯 한 말에 나는 여지없이 나를 부정하게 되었다.


 ‘최선을 다했어?’라는 말은 나의 나태함, 게으름으로 부모, 선생, 대대장, 상사, 사장을 실망시켰다는 자책감으로 고스란히 되돌아 왔다. 그렇게 그 긴 시간 나는 나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자신을 부정했던 만큼 스스로를 가학적으로 몰아 쳤다. 그들이 말했던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말이다. 부모, 선생, 대대장, 상사, 사장은 나를 그렇게 훈육했다. 자신이 원하는 말 잘듣는 아들, 학생, 부하, 직원으로 기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한들 소용이 없었다. 열심히 한 이후에도 그네들의 “최선을 다했어?”라는 말 한마디면 여지없이 ‘나는 아직도 게으르고 나태한 인간이야!’라고 되뇔 수밖에 없었으니까. 또 그렇게 그들이 원하는 최선에 더 다가서려 발버둥을 쳤다. “최선을 다했어?”라는 말은 상대를 자기 부정으로 몰아놓는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 자기 부정을 해소하기 위해 가학적인 노력을 끊임없이 스스로 강요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폭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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