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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각자의 '최선'이 있을 뿐이다.

최선에 관한, 두 가지 다짐

각자의 최선이 있을 뿐이다.


“최선을 다했냐?” 라는 질문은 “넌 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냐?”로 바꿔 말해도 크게 문제가 없다. 부모가 늘 상 했던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어?”라는 말은 결국 “넌 왜 내가 기대하는 만큼 성적이 안 나오니?”라는 말이었다. 힘든 제초 작업을 마치고 쉬고 있을 때 대대장의 “오늘 최선을 다했어?”라는 말은 사실 “왜 내가 원하는 만큼 제초작업이 안됐지?”라는 말이었다. 상사의 “황 대리, 이 보고서 정말 최선을 다한 거 맞아?”라는 말은 “왜 내 맘에 안 들게 보고서를 작성해왔지?”라는 말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으르고 나태한 인간이야!’라며 자신을 부정하고, 또 그 끔찍한 자기부정을 해소하기 위해 가학적인 노력을 계속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그건 누구도 한 사람에게 최선을 물을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각자에게는 각자만의 최선이 있기기 때문이다. 고백하자. 한동안 체육관에 어린 프로 선수들을 보며 그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훈련을 빼먹기도 하고 운동 중에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 적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되었다. 어린 선수들 역시 나름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는 걸. 그들은 ‘복서로 살아서 밥이나 먹고 살 수 있을까?’ ‘이 길이 정말 내 길이 맞는 걸까?’라는 심각한 고민에도 불구하고 애를 쓰며 그 고된 훈련을 하고 있는 거였다. 복서라면, 이 십대 초반의 아이라면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고민이 깊어 졌을 때, 가끔은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고, 가끔은 친구에게 고민을 이야기하기 위해 훈련을 빼먹는 것이었다. 나도 그 친구들도 각자 처한 환경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였다.



최선에 관한, 두 가지 다짐

두 가지를 다짐했다. 하나는, 이제 누군가가 강요하는 최선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관장에게 “저는 복싱을 포기하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복싱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에요.”라고 말했다. 그건 일종의 ‘나에게 최선을 강요하지 말라!’는 선언 같은 것이었다. 관장은 불편했을 법한 이야기에 “네, 이해해요. 이제 형님 상황을 좀 더 고려해야겠어요.”라고 답해주었다. 관장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관장이 앞뒤 꽉 막힌 꼰대 같은 관장이었다면, 관장과 대판 싸우고 그 길로 복싱이라는 꿈을 접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을 테니까. 


 또 하나의 다짐은 나는 앞으로 더 나이가 들어도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했어?”라고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는 나태하고 게으른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만약 누군가 나타하고 게으르게 보인다면, 그건 순전히 나의 입장에서 그를 판단한 것이고, 그가 어떤 삶의 조건에 처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노숙을 하고 구걸을 하는 사람들조차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쉽게 그를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라 단정 짓지 못할 테다.


 누구도 타인에게 최선을 물을 수 없다. 아무리 게을러 보이고 나태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모두 저마다의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최선을 묻고 강요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자신의 기준에서 그것이 최선이 아니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폭력이다. 그래서 누군가 강요하는 최선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내고 있는 삶에서 각자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담대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나는 이제 누구에게도 최선을 다했냐고 물지 않을 게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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