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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과 ‘절대적 가해자’

절대적 피해자와 절대적 가해자 II

절대적 가해자의 탄생

 

 ‘희원’은 어린 시절부터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았다. 그 상처가 피해의식이 되었다. ‘희윤’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다. 다시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을 것 같기 때문이다. ‘희원’은 자신의 피해의식 때문에 근거 없는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만성적인 열등감 무기력, 우울함에 시달리며 산다. 이 피해의식은 희원의 삶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있다. ‘희원’의 피해의식이 야기하는 불행은 개인적 삶에서 멈추게 될까? 

     

“어제 뉴스 봤어요? 다시 강도사건이랑 소매치기 사건이 늘었데요.”
“그게 어디 그 사람들만의 잘못이겠어요.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라 그랬을 수도 있잖아요.”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참, 그런데 김 대리님, 어제 소개팅 했다면서요. 어떻게 됐어요?” 
“좀 별로였어요.”
“왜요?”
“제 생각보다 살이 너무 쪘더라고요.”
“김 대리님 그런 사람이었어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외모로만 평가해요.” 

    

 ‘김 대리’는 ‘희원’과 평소 좋은 관계로 지내던 동료였다. 희원은 평소처럼 김 대리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김 대리’의 소개팅 이야기 나왔다. ‘김 대리’는 상대의 외모 때문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말에 희원은 ‘김 대리’에게 강한 적대감과 실망감이 들었다. 그렇게 ‘희원’은 김‘ 대리’에 대한 호의적인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날 이후 몇 년을 지속해오던 좋은 동료 관계는 조금씩 불편하고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희원’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피해의식의 또 하나의 특성을 알 수 있다. 피해의식은 한 사람을 절대적인 가해자로 위치시킨다. 피해의식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피해의식을 촉발하는 대상을 세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주는 존재로 여기게 만든다. 왜 ‘희원’은 ‘김 대리’에게 적대감과 실망감이 들었을까? 그것은 ‘희원’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김 대리’를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하고 잔혹한 절대적 가해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상대가 세상에서 가장 큰 가해자로 보일 때 어떻게 적대감과 분노(‘김대리’에 대한 실망감은 기존의 호의적인 감정이 분노에 의해 희석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감정이다.)가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절대적인 가해자’라는 망상

       

 객관적으로 보자면 ‘희원’의 생각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다. ‘희원’은 강도와 소매치기에 대해서는 관대한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김 대리’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강도와 소매치기보다 ‘김 대리’를 더 큰 가해자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인가? 폭력으로 겁박하는 강도와 지갑을 훔치는 소매치기보다 어떻게 ‘김 대리’가 더 큰 가해자일 수 있을까. ‘희원’은 마치 연쇄살인범보다 배고파서 빵을 훔친 이가 더 큰 범죄자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피해의식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현실적 인식으로 바꿔놓는다. 피해의식은 자신의 피해의식을 촉발시키는 이들을 절대적인 가해자 위치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희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주’는 성적 차별로 인해서 상처받았다. 집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크고 작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차별을 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 상처는 ‘인주’의 성gender에 대한 피해의식이 되었다. ‘인주’는 늘 남자를 경계하고 남자들과 있을 때 불안하다. 그뿐인가? 자신감 있는 남자들을 ‘마초’라고 여기며 적개심에 휩싸인다. 그런 ‘인주’가 길거리를 지나다 아이를 목에 태우고 걷고 있는 아빠를 보며 말했다. “어휴, 저런 한남 새끼들 다 사라져야 돼!” 


 ‘인주’은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보가에는 아름다운 모습에 ‘인주’가 저주의 말을 내 뱉었던 그녀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그녀는 성에 대한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다. 그녀에게 세상은 ‘가해자인 남성’과 ‘피해자인 여성’으로 구별될 뿐이다. 그런 ‘인주’에게 천사 같은 미소를 가진 아이와 그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와 아빠는 ‘피해자인 여성’이 아니기에 ‘가해자인 남성’일 뿐이다. 이런 착시현상은 왜 발생했을까? 바로 피해의식이 절대적인 가해자를 만들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 뿐만 아니라 그 상처를 준 이와 유사한 이를 절대적인 가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인주’는 실제로 아버지, 선생, 선배, 직장 동료 등등에게 성적 차별을 받았다. 그것은 상처가 피해의식이 되었을 때, 그 상처를 준 이는 다른 어떤 가해자들보다 더 파렴치하고 비열하며 잔혹한 절대적 가해자가 된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피해의식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상처를 준 이(아버지‧선생‧선배‧직장 동료…)들만이 아니라 그 상처를 준 이들과 유사한 이(남성)들마저 절대적인 가해자로 인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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