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플에 대한 기록 2.
내 반려견의 이름은 스티플이다.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늘 묻곤 했다.
"스티플? 무슨 뜻이야?"
그 질문에 이름의 뜻을 설명해야 하는 나는 조금 머쓱해진다.
스티플의 이름을 지은 건 아빠다. 스티플? 어린 나의 질문에 '스트레이트 플러시'의 줄임말이라는 말과 함께 포커에서 사용하는 용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스트레이트 플러시는 포커에서 연속된 숫자와 동일한 무늬를 가진 5장의 카드로 이루어진 강력한 패를 뜻하는데, 사실 포커를 치지 않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말을 해줘도 제대로 이해하진 못한다.
음, 좀 신기한 이름이네? 하는 반응과, 포커? 하고 되물으며 따라오는 시선들.
스티플의 이름을 설명할 때면 대부분 부끄러웠고, 어떨 땐 움츠러들고, 때로는 짜증이 나기도 했다. 이름 좀 잘 지어주지. 저게 뭐람. 구름이, 사랑이, 몽실이처럼 흔한 이름도 많은데. 왜 부끄럽게 만드나, 이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한 때는 충격이기도 했다. 아빠가 이전에 키우던 모든 강아지들의 이름이 스티플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림동 살 때 키우던 스티플, 이십 대에 키우던 스티플,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무리 강력한 패라도 반려견의 이름을 매번 똑같이 짓다니.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우리 스티플은 나에게는 유일한 스티플이기 때문에, 이제는 뭐 아무렴 어떤가 싶다.
진부하지만 처음 만난 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처음 만난 날에 대한 선명한 기억은 없다. 처음부터 나와 함께한 것이 아니었고, 함께 살기 전에는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게 전부였다. 누군가 나에게 스티플을 처음 만난 게 언제냐고 물어보면 확실하게 기억나는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즈음. 그 언저리로 대답하곤 했다. 그 이전의 만남은 글쎄다. 스티플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뭐든 하나 정확한 게 없다. 왜 내 기억은 이다지도 불완전한지, 선명해야 할 기억이 흐릿하기만 한 게 서글프다.
연년생인 언니와 나는 시골에서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방학이 되면 아빠가 살던 곳으로 가서 1-2주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곳에서 스티플을 만났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경기도 안성, 중앙대학교 근처에 있던 신라아파트 나동 208호. 불완전한 기억 속에서 주소에 대한 기억은 비교적 정확하다. 그곳에서 지내던 이모가 출근할 때나 치킨을 배달시켜 줄 때 늘 말하던 주소였기에.
안성에 가면 강아지가 있다는 말에 무섭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시골집에서는 강아지를 키우지 않았다. 집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이라고는 가끔 할머니가 시장에서 사 온 병아리나 닭, 토끼, 그도 아니면 추수가 끝나면 집안 곳곳으로 숨어드는 시골쥐나 뒤꼍 수풀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온 뱀 같은 동물이 전부였다. 아님 마을 안쪽에 있던 농장의 사슴들?
그런 동물들은 대개 징그럽거나 무서웠다. 때로는 끔찍하기도 했다. 그런데 실내에서 키우는 강아지라니! 귀여울 것 같다가도 경험해 본 적 없어서 두려운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아빠를 보고 열렬하게 반기던 스티플.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주춤거리는 언니와 나의 냄새를 맡고, 잠시 짖고, 으르렁 거리다가, 천하장사 소시지를 찾아 물고 오던 모습. 이런 모습은 몇 번의 경험에 의해 선명하게 자리한 이미지이지 분명, 첫 만남에 대한 온전한 기억은 아니다. 어쨌든 방학이 되어 아빠가 지내는 곳으로 놀러 갈 때면 그곳엔 어김없이 스티플이 있었다. 더 이상 언니와 나를 경계하지 않고 꼬리를 좌우로 열심히 흔들며 반기던 스티플이 말이다.
2011년 3월.
스티플이 나와 함께 살기 시작하고, 동네 동물병원에 처음 데려갔을 때 차트 작성을 위해 원장님이 스티플의 나이를 물어왔다. 병원이라면 질겁하는 스티플은 병원에 들어서면서부터 소변 실수를 했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며 내 가슴팍이며 어깨를 긁어대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일곱 살 정도인 것 같다고 건성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빠에게 스티플이 몇 살이냐고 물어봤다. 아빠는스티플이 2002년도에 태어났다고 했다. 눈도 뜨지 못하는 새끼였을 때부터 함께 했다고. 그렇게나 오래됐다고? 아무렴 처음부터 함께 살았던 아빠의 기억이 정확하겠지만, 스티플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째서인지 나는 반기를 들곤 했다. 그렇게 나이가 많다고? 나도 모르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헤어짐을 겁내서 그랬던 걸까.
그러다 문득, 스티플이 떠나고 나서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해보다 훨씬 이전, 내가 더 어렸을 때의 기억이다. 아빠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건 아마 2002년이었을 것이다.
이모 홀로 언니와 내가 지내던 시골집에 다녀간 적이 있었는데 이모의 품에는 아주 못생기고 작은 새끼 강아지 한마리가 있었다. 강아지는 눈도 잘 못 뜨고 비실비실했다. 뭉툭한 코부분과 핑크색 발바닥. 생소한 냄새. 작은 손으로 만지기에도 아주 작았던 강아지.
너무나도 연약해 보이는 존재라 만지기 겁나서 피했는데 한번 손을 뻗은 후로는 계속 만지게 되었던, 부드러운 강아지.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것 같다. 노을이 지는 풍경 속에 이모는 기차를 타야 한다며 다시 강아지를 품에 안고 떠났다. 그 뒷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린 나는 그 헤어짐이 많이 아쉬웠던 것 같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내가 헤어지기 아쉬워했던 대상이 막 정이 들려던 강아지였는지, 아니면 어차피 우리의 곁에 머무르지 않고 떠날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이모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붉은 빛 석조가 내려앉는 그 풍경 속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 멀어지던 뒷모습. 그 품에 안겨 있을 작고 연약한 강아지. 언제나처럼 이별이 버거웠던 나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흐르는 눈물을 남몰래 감췄겠지.
그 작고 못생겼던 강아지가 스티플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많이 울었다. 이젠 의문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언젠가 아빠와 이모가 했던 말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면서 말이다.
아, 우리가 그렇게 만났었구나. 너도 나도 서로 아주 작고 여린 존재였을 때, 그때 우리가 만났었구나. 눈도 잘 뜨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너를 내가 안아봤구나. 그런 적이 있었구나. 그런 기억이 나한테 남아 있었구나. 우리는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거구나.
스티플을 보내고 나서야 조금씩 선명해지던 그 기억, 그렇게 멀어지던 저녁놀 풍경 속 그 모습이 떠올라 많이 울고 말았다.